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가 부활이다. 부활이야말로 죄로 더렵혀진 인생들이 변화 받고 영원한 세계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그동안 죽었던 식물들이 따사한 봄볕이 내려 쪼이게 될 때, 앙상한 가지에서 앙증맞은 노란 잎을 피워낸다. 그러면서 온 세상에 외친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준다. 병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 고비를 이겨내고 퇴원할 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역경을 이긴 승리의 경이로움 때문에.... 부활은 이처럼 모든 창조물들에게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부활에 대해 고전 15장 전체를 할애하여 깊이 있게 설명했다. 고로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와 평안이 주어진다. 반대로 부활을 부정하며 사는 자에게는 캄캄함과 두려움이 늘 동행하게 된다.
목사안수 동기생들 중 두 분이 있었다. 한 분은 장로출신으로 나이가 많았고, 또 한사람은 비슷한 연배였다. 그런데 두 분이 비슷한 시기에 암에 걸렸다. 한 분은 위암, 다른 분은 췌장암이었다. 몇 해 전에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장로출신 동기생과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페북을 통해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런데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항상 고백했었다. 부활을 확실하게 신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활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최고의 선물이고 축복이다 싶다. 영광스러운 부활, 그 부활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 힘들고 어려워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도, 바울은 돌기둥에서 목이 잘리는 순간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활을 소망했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활은 너무나 아름다운 주제이기에 많은 문학가들이 다루었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 톨스토이의 ‘부활’은 감명 깊은 소설이다. 주인공 네플류도프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이 버렸던 카튜사에게 돌아오는 내용이다. 이런 식의 표피적인 부활에 만족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바른 길을 가는 것도 일종의 부활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영적인 부활의 세계로 갈 수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하고 단순히 박애주의로 예수님의 부활을 해석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데 말이다.
역시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야 성서에 기록된 부활의 세계를 믿게 된다. 부활이란 단어는 알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피상적인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믿어져야 하는데 말이다. 부활의 증인으로 동참했던 사도들과 여인들처럼.... 그 일에 증인된 자마다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된다. 죽음은 곧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의 성벽 밖에 있는 세 분수 수도원에는 오른 편에 작은 교회당이 있다. 그 교회당 지하실에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얼마 전에 갇혔다고 전해지는 감옥이 있다. 감옥의 크기는 한 평 반 정도인데, 감옥 벽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4-311) 황제 때 순교당한 10,203명을 기념하는 석판이 걸려있다. 이들은 황제의 거대한 목욕탕 건축에 동원되었던 크리스천들이다. 그들은 로마군단병들로서 황제의 목욕탕 건축에 이용된 후 이곳에서 한꺼번에 목이 잘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을 것이다.
억울한 순교의 상황에서 신앙을 배반하지 않았다. 영광스런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질박한 부활의 신앙이 이번 부활절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한다.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부활의 믿음, 그 누가 이 진정한 부활의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이 영적으로 백신보다 시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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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