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론(Conclusion)
청교도 이주 400주년을 맞아 청교도 신앙 회복과 부흥을 연재하며 필자가 가장 곤혹스러웠던 주제가 인디언 전쟁과 노예제도였다. 첫째, 인디언과의 전쟁, 즉 “가나안 7족속”을 멸하듯이 인디언 원주민과의 대규모 전쟁을 통한 학살(?)에 대한 부분과 둘째,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대한 납치, 인신매매 등등, 인권유린의 종합세트라 할 수 있는 노예제도는 치유 불능(?) 역사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원주민 대량학살 위에 세워진 미국의 건국 두 기둥-전쟁과 기독교”(자주시보), “칼빈 사상에 뿌리 둔 청교도, 미국 정착해 인디언 학살주도”(천지일보), 심지어 일부 교계 지도자들을 포함한 교인들까지도 위 주장에 동조, 또는 오해(?)하여 청교도 정신과 신앙에 대해 폄하(貶下)하며 냉소(冷笑)한다.
그러나 자랑스런 위대한 유산 청교도 정신과 사상으로 세워진 미국역사, 즉 400년 동안 미국 신대륙 영토 확장사에서 인디언 학살과 노예제도는 백인 정착민들에 의한 대표적인 두 가지 비 성경적(Unbiblical) 역사적 과오(Peccability)임이 분명하나, 위 주제들에 대한 정확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왜! 이런 선과 악, 이원론적 구조가 400년간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들에게…, 오직! 성경적인 삶을 추구했던 그 당시 청교도들에게 역사적 과오로 자리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많은 시간 고민과 번민을 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및 정부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결론은 청교도의 사상과 정신으로 건국한 미국은 1620년부터 영국 식민지로부터 완전 독립된 1776년 7월 4일 전까지는 영국 국왕의 통치 가운데 즉 민간인 신분(?)인 청교도들이 인디언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닌 영국왕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영국 군인들이 전쟁을 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독립된 이후에는 미국 정부군 자격으로 인디언과 전쟁을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엄밀히, 정확하게 정의하면 이 전쟁은 청교도들 노예해방선언문(Emancipation Proclamation 1863.1.1)과 인디언 원주민들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영국 본토의 국왕과 미국 대통령의 의지와 지시, 그 명령에 동조한 일부 청교도 정치(政治) 목사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강성, 극단의 민병대와 정부군에 의해 자행된 인디언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청교도와의 전쟁이 아닌 “미국 백인정착민(White Man)과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인디언 사이의 정복전쟁”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렇지만 인과관계(因果關係)상 제국주의와 야합(?)하여 비성경적 이론을 제시하며 선동한 일부 청교도 강성, 극단의 정치 목사들과 선교사들이 있기에 역사적 비판은 피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특히 구약의 “가나안 7족속”과는 달리 땅 끝까지 복음 전파(마24:14), 구원의 대상인 인디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인디언 학살과 핍박은 참으로 악한 것이다.
또한 두 번째 비성경적 과오인 노예제도 역시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과 같은 범죄 행위였다. 특히 강제로 아프리카에서 납치, 인신매매를 통해 노예로 팔았고, 또한 무자비한 인권 말살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당시 노예(하인) 제도를 보면 일반적으로 노예는 7년 계약으로 주인에게 봉사해야 했다. 그러나 충실치 못하고 게으르고…, 주인에게 항의, 거칠게 행동하면 풀려나지 못했다. 이는 성경을 모방(?)했지만 아주 자의적인 해석으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악한 범죄 행위이다.
청교도의 인디언 전쟁과 노예제도는 비성경적 역사적 과오
새 역사의 주인의식 갖고 케노시스 예수정신으로 승화돼야
성경은 사람을 납치해 매매한 경우와 영구적인 종으로 삼은 경우를 정죄했으며(암1:6) 적발 시에는 사형(신24:7, 출21:16)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가 된 것은 빚이나 가난 때문이다. 즉, 노예가 됨으로서, 빚을 갚거나 최소한 거주할 곳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신명기의 노예제도는 종신(終身)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6년 동안 종(노예)으로 일을 했으면 7년째에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신15:12). 그리고 그 종이 퇴임할 때는 부의 일정 몫, 즉 돈을 주라 명령(신15:13-14)했기 때문이다.
거상(巨商) 새뮤엘 슈얼(Samuel Sewall)은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노예제도를 정당시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창1:27)되었기에 인종에 근거한 노예제도를 정죄한다. 감사한 것은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과 노예폐지주의자 윌리암 로이드 등 북부 정치인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라고 주장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견해에 적극 동조하였다. 결국,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주장은 남북전쟁으로 비하되었고 아브라함 링컨의 북부 연합군의 승리함으로 노예 해방과 노예 제도가 완전 폐지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상 청교도 정신과 사상의 실천과 삶에 있어, 두 가지 비성경적 과오를 객관적 시각으로 논술해 보았다. 납치, 인신매매에 의한 인권유린의 노예제도와 인디언들에 대한 학살의 부당함과 잘못에 대하여 선지자적 선포의 사명(?)을 포기한 채, 방임, 방관, 아니 옹호한 부분에 있어서 모든 청교도 목사와 선교사들은 절대 통회, 자복, 회개, 그리고 반드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 청교도들의 공(功)을 무시한, 전부를 부인하면 절대 안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대다수 청교도들은 원주민 인디언을 박해, 살해에 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인디언 선교였다. 물론 이 선교 역사에 있어서도 제국주의(帝國主義)에 동조, 야합한 부정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청교도 목사와 선교사들 및 성도들 중 많은 이들이 진정 인디언들을 품고 사랑했던 것 역시 역사는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들 중 한사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선교사는 인디언들을 위한 헌신적 삶, 즉 29살에 순교의 재물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인디언과의 전쟁(학살?)과 아프리카 흑인을 납치, 인신매매한 비성경적 노예제는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역사적 못 자국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현 청교도를 포함한 모든 백인 후손들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과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잡혀와 노예로 인간 이하(?) 삶을 살았던 모든 분들께 그 과오를 인정하고 그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 치유(治癒), 승화(昇華, Sublimation)할 때라 본다.
또한 인디언들과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쉽지 않겠지만 가해 백인들을 용서하고 분노와 보복의 마음을 버리므로 창조적 에너지가 충만한 위대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국민으로서 새 역사가 이루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또한 종말의 시대 상황 속에서 새 역사의 주인의식(Owner Consciousness)을 다 함께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지난 부정적 과거에 매몰되어, 원망과 불평의식에서 탈피하여, 창조적 에너지가 충만한 미래지향적 위대한 미합중국 국민으로, 아니 진정한 케노시스(자기 비움) 예수 정신으로 충만한 청교도적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으로 승화(Sublimation) 되어야 한다. “God bless America”
kimjoyh@gmail.com
[편집자] 2020년 코비드 기간 동안 “청교도 신앙회복 및 부흥”에 대한 글 32회분과 그 후기 5편을 매주 연재한 필자 김경일 목사에게 감사드린다.
03.0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