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국어사전에서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라고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덧붙인 설명을 보면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되는 이념으로 보기도 한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옳고 바름을 나타내는 단어가 정의(正義)로 이해된다.
옳고 바름에 대한 설명은 사람에 따라 또 그 상황에 따라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매우 다양할 것이다. 다만 정의에서 절대로 필요한 조건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정의에 있어 사랑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말이다. 고전 13장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로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신앙의 영역이라 사회적 정의와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며 사랑과 희생이 사회적 정의의 진수임을 설명한다. 그 대상도 분명히 소개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10:18),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은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와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20-21)고 명령한다. 고아와 과부와 객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천하 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지 않는 처사며 인색을 넘어 불의(不義)임을 질책한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옳고 바름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이 지구촌을 강타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여세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이제는 두려움을 넘어 공포가 되어 어디에서도 평화와 안녕을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이 기회며 상생의 대명사로 떠오르던 세계였으나 코로나19 앞에서 세계는 단절되고 집안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이타(利他)가 아닌 이기(利己)만이 살길이라며 굳게 잡았던 손들을 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2-5)는 말씀에 유의하자. 의사와 간호사라는 그 이름에 담긴 사명으로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일선에서 바이러스와 생사를 걸고 싸우는 의료진이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방역 팀과 밤잠을 설치며 소임을 다하는 담당자들도 있다. 전염에 노출되었을 때 기꺼이 격리되며 지침을 준수하는 국민도 있다. 이런 모든 참여와 사명이 덕분에를 만들어 냈다. 그 어떤 단어보다 더 아름다고 의로우며 당당한 이름 덕분에가 탄생했다. 덕분에의 주인공들인 칠천 명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다.
흑인보다 더 우월하다고 백인은 우쭐할 수 없다. 한국보다 미국이 더 잘 산다고 으스댈 수도 없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은 결코 차별이 아니다. 그저 다른 차이일 따름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는 아담과 하와였다. 피부색이 다르고 환경과 문화가 달라도 모두 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 전제된 사마리아인의 정의가 팬데믹이 되어야 한다. 동서양의 구분이 없고 신구세대의 구별도 없이 서로를 향해 덕분에를 외치는 팬데믹이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루신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은 약자들을 위한 정의며 진리에 맞는 옳고 바름을 향한 덕분에의 존중이다.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신다. 그런 하나님의 눈에 이 세상의 무엇이 보일지가 정령 두렵다. 어디에도 사랑이 전제된 정의가 없다면 이 세상은 노아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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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