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조국으로 섬긴 사람들…

서울 녹번동 은평 평화공원에 군복 차림의 동상이 서있다. 6·25전쟁 때 서울 수복 작전 때 녹번리 전투에서 29세로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리는 조형물이다. 동상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해밀튼 대위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1년에 한국에 파송을 받았던 아버지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 외국인 학교를 마친 후에 아버지의 모교인 오하이오의 웨슬리언대를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에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해밀튼은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제대 후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를 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 친구들에게…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 유창한 한국말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 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군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녹번리에서 전사를 했다.

그의 숭고한 사랑에 감명 받은 미국 고향교회 교인들이 기증한 1만4500달러로 아버지 윌리엄 얼 쇼가 1956년에 대전 목산 언덕에 기념 예배당을 세웠는데 지금의 목원대학의 채플이라고 한다. 해밀튼의 부인은 남편을 잃었지만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 병원의 사회사업실에서 봉사한 후 은퇴하면서 한미 양국으로부터 충무, 은성 훈장을 추서 받기도 했다. 

해밀튼의 두 아들들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서 흘브라이트 장학 사업을 펼치면서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했고 둘째 아들은 오하이오 법원판사로 재직하면서 어머니를 모셨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윌리엄의 4대손, 해밀튼 대위의 손자는 연대 의대에서 편집자로 근무했고, 손녀는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고 한다.  

일찍이 백낙준 박사와 몇몇 지인들이 해밀튼 대위의 조국 사랑에 감격하여 1956년에 녹번리에 해밀튼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지금도 6월이 되면 해밀튼 쇼 선교사 가족들의 헌신을 기리는 지인들이 찾아와 저들의 숭고한 삶과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다음 서울 방문 때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오래 전에 녹번리에서 살았는데도 몰랐던 사랑이었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흑암의 구한말 조선을 자신들의 조국이라고 여기며 가문의 대를 이어 밀알 되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인다. 지금도 한국 구석구석에 묻혀 있는 수많은 밀알들의 삶을 묵상하며 호국의 6월을 돌이켜 본다.  

jykim47@gmail.com

 

06.20.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