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의 천재 몽테뉴(Montaigne1533-1592)는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이었다. 신장결석으로 반평생을 고생하였고, 아버지와 사랑하는 딸을 잃었으며 남동생은 어이없게 테니스공에 맞아 죽는 비극을 현실로 대면해야 했다. 다정했던 친구마저 세상을 떠나자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법관직을 내던져버리고 고향으로 은둔해 버려야 했다. 그는 서재에 루크레티우스의 경구를 붙여놓았다. “더 오래 살아봤자 새롭게 얻을 것이 없다” 그런데 몇 년 뒤 이 암울한 경구를 떼어버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에세(Essais)를 발표했다. 고난이야말로 인생의 질곡에서 더 깊은 샘물을 끌어올리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비참한 상황을 맞고 있다. 영국에서는 25살 된 기저질환이 있는 앞날이 창창한 처녀가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죽어갔고, 세계 초 일류국가라는 미국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곁에 위로하는 가족 없이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다. 이태리에서는 죽은 지 며칠이 지나서야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했고, 또한 공부를 잘해야 갈수 있는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과 레지던트의 긴 과정을 거쳐 의사 가운을 입게 된 의사들이 무려 3백 명 이상이나 죽어간 상황을 맞이했다. 지극히 평화로운 시대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우리는 수시로 만나고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물질로 본다. 그래서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 가차 없이 죽인다. 그래서 스탈린은 2천3백만 명을 죽였고, 모택동은 7천8백만 명을 죽였다.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쓸모없는 존재요,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인,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로하고 잔인하게 치리한 자를 처단하기는커녕 여전히 모택동은 지금도 존경의 대상이다. 그런 중국을 흠모하는 자들도 있고.... 아마도 세상은 이런 악한 사상이 착한 가면을 쓰고 미소 짖는 일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하박국 선지자는 공의가 사라지고 죄악이 팽배한 세상을 탄식하며, 어찌하여 거짓된 자를 방관하며 악인이 득세하는 데도 잠잠하시느냐고 호소한다(학1;13).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상과 비슷하지 않을 까 싶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를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고쳐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를 말이다. 낙심하거나 비관만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고치고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로 인한 개선이 있어야 되지 않을 까 싶다. 이런 비극을 너무나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는 아닌지 모른다.
항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유는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로마의 희극 시인 중 한 사람인 레렌티우스(Bc195-159)가 자신의 희극에서 크레메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이는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대사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치열한 전쟁터도 아닌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흔한 유언 한마디 없이 죽어가고 있다. 마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난파를 당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 많은 소망과 꿈들을 펼쳐보지 못한 채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한계 효용의 법칙처럼, 우리는 지금 이런 정황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런 환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오늘은 로마가 흐리고 바람까지 심하게 분다. 마치 그 옛날 영웅 시저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로마시민들에게 알려진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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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