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반 (Κορβᾶν)

'거부, 동의하지 않음'의 뜻을 가진 '반대(反對)'라는 단어는 여러모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 오직 반대하기 위한 반대를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심할 수도 있다. 윌리암 먼로는 사람들은 보통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투표를 한다는 말로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소신 있는 반대, 모두를 위한 반대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의미의 '반대'라는 단어가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변모한다. 나를 위한 부정적인 반대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소신 있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훌륭하게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좋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 첫째,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 둘째,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셋째,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 둘째와 셋째 만남은 인위적으로 가려가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은 이 세상 그 어떤 자라도 스스로 원해서 맺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관계를 천륜(天倫)이라고 한다. 이는 부모와 자녀 관계가 불가분리(不可分離)라는 것을 가리킨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는 “부모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너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곁에 좋은 친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은 “자식들의 운명은 언제나 그의 어머니가 만든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어린 자녀에게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탈무드에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자녀들을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두셨다”라는 격언이 있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고 말씀하셨다. 이는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을 인용한 말씀이다.

유대인 전통에 “고르반”(Κορβᾶν)이란 게 있다. 이 말은 “제물”, “헌물”이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림”,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신앙적 의미로(레2:1,4,12) 사용했으며, 사전에서는 “기원(祈願)한 것이 이루어진 데 대한 사례로 신에게 바치는 물건”이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전통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었다는 데 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 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 다른 계명(부모 공경 등)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한 자는 “고르반”된 물건의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 치 않을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호크마 주석에서).

호크마 주석은 당시 고르반이란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밝혀준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 전통을 악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전통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7:11-13)고 지적하셨다. 여기에서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막7:11)이란 말을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 무엇”이란 말로서, 이는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이라는 것을 다음 문장인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전통과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게 되는 폐단(弊端)은 오늘날은 더욱 팽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르반의 오용, 즉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맹세했으니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서 해방되었다는 잘못된 전통을 단호히 꾸짖으신 것처럼 이 고르반의 유전을 강하게 반대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부모를 주셨다. 부모공경은 또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 편에 선 거룩한 성도는 이 고르반을 반대하고 부모를 잘 공경해야만 한다. 

hanmac@cmi153.org

 

05.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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