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전달된다는 사실에 엄청 놀랐다. 시대의 변했구나 하는 마음과 삼십년 세월의 연한이 필자를 뒷방 노인 같은 경직된 사고로 내몰았나 싶을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도 들었다.
일의 선후와 때
노동인권에 담겨진 항목들이 틀린 내용인가? 아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의 선후와 때를 가리지 못한 채 홍수 날에 댐 물이 터진 것처럼 우후죽순 격으로 모든 것을 혁명하듯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떤 일이든지 아무리 옳게 보여도 때의 분별이 필요하다.
개방된 부모들 가운데, 자녀에게 너무 일찍 성에 대한 지식을 세밀하게 가르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아이가 분별력을 가지기보다 교육과정에서 알게 된 죄에 대한 호기심과 유혹에 훨씬 더 많이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열심히 이단에 대해 강의하고 설교하고, 타 교회들을 비판하면서 옳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한 이해와 관용보다는, 결과적으로 교인상호간에 훨씬 더 많은 정죄와 불신을 가져왔다는 말을 들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깨끗한 교회를 표방하면서 끝없는 비판과 판단에 열을 올렸더니, 교회에 죄인들은 남아있지를 못하고 모두가 의인인 사람들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참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노사 간의 의견이 갈릴 때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을 함께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결코 ‘투쟁과 파업’이 ‘협력’보다 먼저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와 기업의 유익한 공헌들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먼저 충분히 학습한 후에 대학에 가서 배워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태여 이제 막 사회를 공부하고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투쟁과 파업부터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인가?
편향적인 분리의 잣대
그럼에도 이제는 고등학생 뿐 아니라, 중학생과 초등학생에게로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배움에도 때가 있지 않은가? 또한 아무리 옳음이 정당하여도 배움에는 선후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만 악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선과 옳음을 먼저 배우고 학습할 경우 그 선함으로 악을 이길 가능성이 더 있지 않겠는가? 물론 파업을 선악에 비하는 것이 논리적 비약일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긍정의 측면, 삶의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는 옳음과 정의에 대한 것을 충분히 인식한 후에 세상과 사람의 악함과 부정으로 나타나는 일들을 경험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편향적이고 분리적인 잣대가 아니라 모두를 살리고 세우는 방향으로 더욱 큰 상생을 도모할 기회가 확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호 협력과 상생의 방법을 충분히 먼저 배운 후에 자연스럽게 극한 파업과 투쟁을 배워도 늦지 않을 것임에도, 일의 선후와 때를 가리지 않는 정권지향형의 교육방법과 투쟁은 반드시 튼실하지 못한 열매를 맺고 말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보수적인 청년들의 관점을 반공교육의 탓이라고 핑계하는 저들의 말속에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필자의 경험칙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편향을 유지 보존하기 위한 정치적 의식화의 과정을 자라나는 어린 영혼에도 주입시켜 소년당원에서 출발하여 평생 당원을 만들려는 의도에 다름 아닌 것 같다.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조국을 생각하면 마음 한켠 답답함을 지울 수 없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서도, 각자의 소견과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한다. 심지어 공정언론이어야 할 방송국이 생명 같은 공적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국민들에게 옳은 판단을 주도록 최고의 정보를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달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생각을 억지춘향 격으로 끼워 맞추어 국민을 집단 계몽시키려 한다. 사회주의 국가 형태가 아니고서 어떻게 이것이 허용된단 말인가?
한국에서 30년 교수로 봉사하던 분의 이야기이다. 그는 더 이상 신문을 보지 않고, 보더라도 믿지를 않는다고 한다. 옳음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공공언론도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실만을 전한다. 이를 가리켜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편향성과 왜곡
지난 삼일절에 대통령이 ‘빨갱이’란 단어를 두고서 획정적인 의미적용을 시도했다. 일본 강점기 때 항일무장유격대를 지칭한 ‘파르티잔’에서 나왔다는 설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이들을 친일파들의 저항으로 해석하며 상대방을 공격했다. 과연 그것만인가? 아주 적절하지 못한 연설이었다. 삼일절 만세운동을 통해 지향했던,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대동단결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그 숭고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국민을 또 다시 찢고 편 가르기 하는 발언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 말들이 왜 그곳에서 필요했을까? 자신들이 가진 사실과 진실이 훨씬 더 소중하고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어버리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과연 빨갛다는 그 의미가 그것 하나뿐인가? 아니다. 실제 그런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 소련의 국기 색깔이 빨간 데서도 유래했으며, 중국의 국기도 붉은 깃발이고 공산 위성국가 대부분의 국기도 빨간색이 주조를 이루어서, 그 때문에 해방 이후엔 주로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인 예가 아닌가?
의미를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대통령의 의미 확장에 있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마디로,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각주를 지나치게 오용한 예에 다름 아니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말이라고 할 때는 정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 까지도, 그가 돌보고 보호해야 될 한 국민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가 되지 못하니, 한쪽에서는 여전히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를 내뿜게 되고 다른 쪽에서는 열심히 자기 편 챙기기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과 여유
한국사회를 보면 예전의 아주 먹고 살기 어려웠을 때처럼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 조금의 여유도 없다. 함께 밥그릇 싸움을 하다가, 밥그릇을 엎어도 저 사람만 먹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더불어 같이 먹고 살 길이 있을 터인데, 상호인정을 하지 않는다. ‘누가 누가 못하나?’를 두고 경쟁하는 것 같다. 파괴적이고 편향적이다. 결코 미래의 성장과 부흥을 맛볼 수 없다.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다. 충분한 선과 옳음을 먼저 배워야 한다. 공동의 목표와 본질을 먼저 배워야지 거짓을 분별하며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 급할 이유가 없다. 교회나 사회공동체나 모두가 충분히 좋은 것, 선과 의와 옳음과 정의를 배운 후에 죄와 악이 지배하는 세상나라를 배워도 늦지 않다. 가만히 두어도, 인생은 죄와 어둠을 익숙하게 따라갈 만큼 매우 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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