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까지는 필요 없다, 멍청하기만 하면 돼.’

주의! 이것은 사탄의 계략임

막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겪었던 일을 나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이건 사실 주님이 내가 떨쳐버리기를 바라지 않는, 일종의 영적 성장과 관련된 기억이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예배와 관련해서 얼마나 심각한 위험이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기 때문이다.

어느 일요일에 우리 가족은 진지한 기독교 전통과 관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매력적인 모델로 불리는 것에 슬쩍 슬쩍 손을 대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 지도자들은 잠재적인 등록 교인들의 관심을 끌어서 교인 숫자를 늘리려면 예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예배 요소 중 일부를 제거하고 그것을 신선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요소로 대체했다.

슬프게도, 그들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것 대부분이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참석했을 때쯤에 기도는 이미 형식적이 되었고, 설교는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찬양은 현대 히트곡을 나쁘게 각색한 식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다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밋밋한 커피가 세련된 부티크 커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건전한 예배 원칙이 그만 실용 원칙에 자리를 내주고 만 상태였다. 더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교가 끝나고 여전히 여자친구와 동거하고 있다고 고백한 한 남자를 위한 세례식이 이어졌다. 그리고 찬양팀이 멜로디도 연주도 형편없는 80년대 팝송을 각색한 찬양을 시작했다. 그 곡은 원래 파티와 술 취함에 대한 노래였지만, 가사가 예수님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쯤 나는 간접적인 당혹감에 움츠러들었다. 내가 죽어라 억눌러야 했던 건 확신하건데 정당한 분노였다. 나는 같이 간 식구들에게 속삭였다. "진짜 멍청하다. 다시는 이 교회에 오지 않을 거야." 그날 예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방법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다 멍청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그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상기하곤 했다. 그건 교회에 해를 끼치기 위해서 사탄이 굳이 예배를 이단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진리를 저주받은 오류로 대체할 필요까지 없다. 그냥 예배를 멍청하게만 만들면 된다. 진부하고 쓸모없는 예배로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예배를 진지하지 않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결국 교회는 힘이 약해지고 권능이 쇠퇴하며 성령의 임재를 잃을 것이다.

사탄이 교회에 해를 끼치고자 할 때, 그는 이단자를 설교단에 세우거나 교인 중에 이리가 들어오도록 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은 교인들로 하여금 구식으로 보이는 예배를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듦으로써 다른 무엇을 요구하게 만들 수 있다. 목사들이 긴 기도를 부끄럽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긴 성경본문을 다 읽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요점을 본문의 요점과 연결하는 것이 혹시 설교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를 궁금해 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은 교회가 신선하고 매력적이 되어야 지역 사회를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특히 찬양에서 그래야 한다고 강조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에 따라 서서히 교회를 바꾸어갈 것이다. 예배를 천천히 바꾸어 거룩한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신성한 것에서 불경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의미 있는 것에서 멍청한 것으로 바꿀 것이다.

어린 시절에 기억하는 또 다른 교회가 있다. 이모와 삼촌은 규제 원칙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장로교회에 다녔다. 교회는 예배에서 신약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요소만을 허락했다. 그 점은 찬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오로지 시편만 불렀고 반주는 없었다. 한 번은 우리 교회에 온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 왜 찬양을 같이 안 불러요?”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구약을 봐라. 하나님은 잘못된 방식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다 죽이셨다." 그 장로교회 교인들의 모든 신념과 말씀에 대한 그들의 엄격한 해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예배에 대해서 이런 저런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진지성에 관해서만은 의심할 수 없다. 그들이 받은 예배 지침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개인과 교회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예배 방식과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지시하신다고 믿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전적으로 맡기셨다고 믿는가?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주셨다고 믿어야 할까? 아니면 우리 생각에 적절한 방식으로 하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판단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어냐에 따라서 교회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매력적인 예배 모델이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보편적이었던 답이자 또한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었던 답은 이것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의 지시를 당혹감이나 원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주저하거나 불순종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겸손과 경외심, 예배를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최상의 방식으로 예배토록 방법을 일러주시는 그분을 향한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예배 방법을 스스로 창조해 내는 대신에 단순하게 명령 받은 대로 하라는 것이다. 나 자신을 신뢰하는 대신 그분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찾아서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다. 하나님이 명령한 대로 그를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분이 가장 잘 아신다.

by Tim Challies, TGC

03.15.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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