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도 나누면 작아진다(상)

목회, 사람을 향하는 사역

 

우리는 교회를 성별된 공동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론이지 현장을 들여다보면 세속집단보다 저질스러울 때가 많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사람들이 빚어내선 안 될 추태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포장된 크리스천은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천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라는 글이 떠오른다.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 신앙과 삶의 괴리를 당연시 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 교회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는 천사군의 거처도 아니고 거룩한 사람들의 집합체도 아니다. 죄 많고 허물 많고 아픈 사람들이 모여 사함 받고 고침 받고 거듭나는 종합병원이다. 상처 주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씨름하다가 해법을 찾는 명 상담소, 거기가 교회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 불완전한 입자들이 모여 산고 끝에 명품을 만들어내는 곳,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패배자들이 소망의 밧줄을 잡고 재기에 성공하는 신령한 사닥다리, 그곳에 교회의 존재가치가 있다. 

천상교회는 영원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지상교회는 한시적이고 불완전하다. 가견적 교회는 어느 교회는 좋고, 어느 교회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지상교회는 크든 작든 약점과 한계를 가진다. 정통을 내세우고 성령운동을 앞세우는 교회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를 게 없다. 그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 개체가 불완전한 입자들이기 때문에 명품 생산이 어렵다. 사람들을 새로 뽑고 새 건물을 세워도 그 사람들 때문에 조금도 다를바 없는 졸품이 양산된다.

목회란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존재하고 필요하다.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목회는 사람을 알고 다루는 사역이다.

김난도 교수가 쓴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는 책이 있다. 문제는 1천번을 흔들고 가르쳐도 성숙한 그리스도인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김명혁 목사는 “선교란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센터를 마련하는 것이 선교의 축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놀아주는 것이 선교라는 데 동의한다.

목회도 예외가 아니다. 조직을 강화하고 건물을 짓고 프로그램을 이벤트화 하는 것은 목회의 방법이지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사람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풀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이 목회라야 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전국 초중학생 1.9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 학생 중 28.9%는 가장 마음에 상처 되는 말로 “너는 왜 그 모양(꼴)이니”를 꼽았고 “000처럼 공부 좀 잘해라”가 24%로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난다는 반응이 40.5%였다. 문제는 상처받는 현장이 가정이라는 점과 상처 주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점이다.

교회 때문에 화나고 숨이 가빠진다면 육체 건강은 물론 영혼의 건강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우리 시대는 아프다. 교회도 아프고 사람들도 아프다. 목회자도 예외 없이 아프고 교인도 아프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증가수치를 볼 수 있다. 2006년 302,080명, 2007년 330,451명, 2009년 342,261명, 2011년 535,000명이 병원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라고 한다.

교회는 이 일 저 일로 여기저기서 화난 사람들이 모여 화풀이 하는 곳이어선 안 된다. 화를 풀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동체라야 한다. 그 중심에 목사가 서야 한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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