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주권 인정할 때 충만에 이른다!

2017 성령강림주일 위한 종교개혁자들의 성령이해 재조명
성령의 주권 인정할 때 충만에 이른다!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고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예수를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과 말씀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닫게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령은 권능을 주셔서, 복음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래서 성령 강림으로 촉발된 교회의 시작과 성령의 인도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까지 복음을 들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2017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우리는 먼저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배우고,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억하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또한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참된 말씀을 올바로 알고, 그 말씀에 따라야 한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또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으로 권능을 행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보일 때 식어진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또 땅에 떨어진 기독교의 위신도 다시 세울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의 주권을 온전히 회복할 때만이 우리는 충만함에 이를 수 있다.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교회가 왜곡 축소시킨 성령 하나님에 반대하면서, 종교개혁을 이뤄나갔다. 올 성령강림주일에는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사상들이 어떻게 교회를 올곧게 세워나갔는지를 살펴본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지만 칼빈을 비롯한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성경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로마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가장 첨예하게 대결했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 중심적 성경해석의 큰 물줄기를 성령 중심적 해석으로 돌려놓았다. 이것은 곧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은 반드시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돼야 한다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칼빈은 비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황이나, 모하메드나,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을 단호히 배척했다. 그들이야말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은 카톨릭교회의 배타적 권위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해석학적 방법이었지, 인간의 이성과 인식론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 진리가 성령에 의해서 초월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신학자로서 칼빈이 당대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문제점을 수정하고자 제시한 핵심적인 내용들 가운데서 성경관, 신론, 기독론, 교회관, 구원론, 성례론, 설교론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로마가톨릭에 따르면, 구원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전달되고 주어진다고 했다. 그러한 교회의 성직주의와 독선적인 주장들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성령의 적용사역이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가 적용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주장해, 제자리에 되돌려 놓은 신학자다. 칼빈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신학, 특히 결정적으로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새롭게 제시했다. 면죄부와 고해성사, 미사참여로 혼돈을 겪고 있던 중세말기 로마가톨릭교회의 모순과 미신적인 신앙행태를 제네바교회에서는 완전히 철폐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촛불을 밝혀놓고 성자들의 공로에 의지하려는 기도는 금지됐다. 성령의 신비로운 작동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개인에게 믿음을 주며, 말씀으로 교회에 감동을 주신다는 점을 역설했다.

구원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적용사역에 의해 결정된다. 성령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의 심령에 심어지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만들어진다. 성경은 성령에 의해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써놓은 책이기에 성령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가 돼서 구원사역에 동참한다.

성령은 최초의 예루살렘교회를 창설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모든 구원의 방편들을 활용해서 성부의 계획이 성자로 인해 성취됐고, 이를 적용하고 보전하는 구원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칼빈은 결국 기독교 신학사에서 성령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체계화시킨 것이다. 미국에서 20세기 초엽에 시작된 오순절운동이 여러 개의 교단을 형성하면서 마치 성령론을 부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오순절파 교회들만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좁은 해석이다. 1907년 미국에서 오순절파의 방언운동 이후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어졌다는 주장도 잘못된 말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 한 가지에 해당하는 방언운동을 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령의 사역 중에 권능이나 신비주의적 은사를 받는 것만이 믿음 생활의 최고치라고 오해하고 있다. 결론으로, 칼빈은 그를 따르는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에 철저히 의존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칼빈은 분명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말씀을 선포했다.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성령의 역사로 갖게 됐다.

기독교가 살고 죽는 것은 어떤 사람의 힘이나 어떤 사회적인 영향력이나 재물 같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초대교회 그 어려운 시기에도 믿음을 굳게 해주시고, 그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능력을 보여주시며,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에 달려있음을 기억하고, 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워지며, 강건해지며, 거룩해지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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