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벅찬 감동으로 맞는 부활절 되길!

2017년 부활주간, 종교개혁자들의 시각으로 재조명
가슴 벅찬 감동으로 맞는 부활절 되길!

[부활절은 교회에서 일년 중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절기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에 근거하며 그 고백의 성경적, 역사적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혹은 그의 부활을 우리가 믿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절을 맞이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일단 사순절이라 불리는 40일의 거룩한 시간을 지극한 경건 속에 보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교회마다 특별 새벽기도회를 드린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금식을 실천한다. 특별히 부활절 전 1주일은 고난주간으로서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 거룩한 삶에 집중한다. 그야말로 부활절을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성스럽고 경이적인 시간으로 체험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골고다의 죽음을 통과했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따라하는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런 관례를 따라 지난 40일을 보냈다. 소박하지만 최선을 다해 부활절을 준비하는 이유는 바로 관객이 아닌 조연배우로 함께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다시 짚어본다.]

부활절은 인간의 최고 한계상황인 죽음의 장벽이 무너진 날이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죄의 결과인 죽음의 장벽이 무너지고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종말론적 희망이 잉태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주간에는 우리는 다시금 그 무한한 사랑에 붙잡혀야 하고, 나의 몸을 부활에만 담그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의 중심에 서있는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고, 그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 특히 진보적인 사람들이나 세속적인 사람들은 부활 사건을 일종의 가설이나 신화로만 치부한다. 부활을 하나의 신화로 보기 시작한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에밀 부르너는 외쳤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이런 논의들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활이 주는 유익에 관해서도 루터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와 죽음이 정복되고 새로운 생명이 보장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부활 신앙은 “이성의 모든 느낌과 이해에 반하여 우리를 죄, 죽음, 지옥 너머로 우리를 조용하게 인도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눈앞에 구원을 바라볼 것이고 또한 우리가 믿었던 것, 다시 말해서 죽음과 모든 슬픔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완전하게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위대한 맞교환’이 일어난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우리의 죄악과 약함은 그리스도의 순전함과 능력으로, 우리의 절망과 패배는 그리스도의 소망과 승리로 대체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이 같은 주제는 루터가 죽을 때까지 행한 그의 설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칼빈 역시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롬4:25; 빌3:10~11; 벧전1:21).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부활을,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교훈에 머물게 되고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허탄한 사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전15:17; 롬8:34). 둘째,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는 ‘중생하여 의에 이른다’. 그리하여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롬6:4; 골3:3).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기독교강요 2.16.13).

이처럼 부활의 의미를 칼빈은 더욱 더 직접적으로 표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칼빈의 무덤은 지금까지 어느 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칼빈은 이 땅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다. “나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남기지 말라!” 일생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간 칼빈다운 유언이었다. 칼빈이 마지막으로 목회했던 제네바 성 피에르 예배당 근처에는 공원묘지가 있다. 그곳에 가면 J. C라고 씌어진 무덤이 있다. 존 칼빈이라는 이름이다. 비어있는 무덤이다. 그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그 무덤에서 계속해서 부활의 복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결론으로, 루터나 칼빈은 부활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며, 부활이 부정되는 신앙은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라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부활의 감동을 상실한 신앙인은 가장 서글픈 존재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맞이하는 부활절은 가장 쓸쓸한 날이다. 그러므로 이번 부활절은 상상이나 신화가 아닌 구체적 역사로, 아득한 과거가 아닌 가슴 뛰는 현재로, 타인의 모호한 기록이 아닌 자신의 결정적 체험으로, 달력에만 존재하는 무감동의 시간이 아닌 존재의 중심으로, 침투하는 기적의 사건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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