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공감(共感)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공감은 객관적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촛불과 태극기에 생명을 걸 듯 매달린다.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공감토록 한다면 지지율이 오르고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문제다. 따라서 이 불확실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인간 최대의 관심사이고 그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첫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은 의외로 많다. 사람이 숨을 쉬는 산소, 사람이 사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사랑, 느끼는 감정, 신앙의 대상인 신(神)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종교적인 영역인 신을 제외하면 산소나 사랑, 감정 등은 보이지 않아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신에 대한 신앙에는 일률적으로 통일되지 않는다. 필요와 기대에 따라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신앙하는 까닭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아이러니가 이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의지로 기획하고 그것을 손으로 어떤 형상을 만든 뒤 그것을 신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정상적인 이지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도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든 뒤 그것이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이라고 규정할 만큼 어리석다. 어찌하여 사람의 모습도 아닌 짐승의 형상으로 신을 만들었는지 그 심리를 알 수는 없으나 그래야 인간의 마음대로 신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란 얄팍한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영적인 상태 즉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여 보이는 신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맹점이며 불행인 것이다.

둘째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포복(怖伏)은 인간이 취할 수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위엄을 익히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처럼 된다는 실현 불가능한 유혹에 현혹되어 선악과를 따서 먹은 존재다. 그러니 인간의 속성에는 완전하거나 온전한 순복은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은 종교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설계한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와 신이 태생하였다. 자기만족과 위안의 수단으로 만든 것이 곧 종교며 신인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과 교감한 부류(部類)다. 기독교가 이에 해당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도 공감의 폭과 깊이에 따라 구교와 신교로 나뉘고 신교에도 많은 교파가 파생하였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으로 갈라져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이되 신앙의 방법과 교회법 등은 나뉘어 있다.

다양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공감이다. 공감하는 유유상종(類類相從)에 따라 종교가 달라지고 교파도 갈린다. 이렇게 나뉜 종교와 교파는 어느 정도 고착(固着)되어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신앙의 대상과 방법도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는 공감하는 대상을 찾아 포교(布敎)에 매진하고 있다.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도 비 기독교인들과 어떻게 공감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세상과 소통하여 공감을 이뤄내지 않고는 발전과 부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정체되어 있는 기독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감된 기독교인들 간에도 성도의 의무와 권리가 따름을 교육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소속감을 가지게 되고 참석이 아닌 참여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참석은 종교도 신안도 아니다. 기독교인도 불교의 어떤 의식에 참석할 수 있는 이슬람도 기독교의 어떤 의식에 참석할 수 있다. 따라서 참석하는 것은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공감이 필요한 것은 참여토록하기 위해서다. 교제의 대상은 같은 기독교인일 수 있다. 오히려 같은 기독교인이라면 더 깊은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선교의 대상은 비 기독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서로 소통하면서 마침내 공감을 이끌어낼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것이다. 구속의 유비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남자 혹은 여자, 중국인 혹은 아랍인, 청소년 혹은 장년에 따라 구속의 유비를 마련하여 접근하고 긴밀한 소통을 통해 공감토록 하는 모든 과정이 선교 또는 전도라면 이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술이라 할 것이다. 이 좋은 기술을 바로 익혀 그것으로 무지를 일깨워 공감하는 것에 참여토록 하는 것은 맡은 자의 사명임과 동시에 의무가 된다. hanmac@cmi153.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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