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동의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바로 트럼프가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하지만 더 큰 흐름 속에서 트럼프는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서구에서 급부상 중인 포퓰리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지역에서 포퓰리즘은 주류에 도전하는 세력이지만, 헝가리 같은 나라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등 점차 대중을 사로잡으며 힘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포퓰리즘(Populism)은 대중주의(大衆主義) 정치철학으로서, "대중"과 "엘리트"를 동등하게 놓고 정치 및 사회 체제의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 또는 그런 변화로 정의된다. 한마디로,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 사상, 활동"이다. 포퓰리즘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든 버전에는 공통점이 있다. 엘리트와 주류 정치인, 기득권을 향한 의심과 적대가 바로 그것이다. 포풀리즘은 흔히 “잊혀진 보통사람들”을 대변하고, “진정한 애국자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역시 2016년 4월 월스트리트저널에 “수십 년간 소수의 엘리트가 망쳐놓은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해독제는 과감한 대중 의지의 주입뿐이다, 이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 사안에서 대중은 옳고 지배 엘리트들은 틀렸다”고 썼을 정도로, 엘리트로 대변되는 지배 계층과 보통 사람들로 대변되는 피지배계층으로 미국사회를 양극화시켰다. 2016년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오스트리아 퍼스트”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노르베르트 호퍼는 상대 후보에게 “당신 뒤에는 상류사회가 있지만, 대중은 나와 함께 한다”고 선동했을 정도로, 지금 서구권은 포퓰리즘 쓰나미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포퓰리즘이 주는 유토피아적 신화와 사회를 “적 아니면 동지”라는 가르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예수는 포퓰리즘이 아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선포하셨고, 엘리트이건 가난한 자이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동등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린어패어스’는 서구권에만 선풍적으로 맹위를 발휘하고 있는 포퓰리즘을 문화적 시각으로 해석한다(Populism on the March: Why the West Is in Trouble). 그 내용의 중요성 때문에 3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
역사적으로 포퓰리즘에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두 부류가 공존하고 있다. 서구에는 늘 주류 좌파 정당을 가리켜 시장 친화적이고 대기업에 타협적이라고 비난하는 극좌파가 존재했다. 하지만 냉전을 거치면서 서구의 좌파 정당들은 대부분 중도에 가까워졌고, 그 틈을 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좌파 포퓰리즘이었다. 하지만 2007-8년의 금융위기 전까지 그 틈은 비어 있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산을 잃고, 그리스와 스페인의 실업률이 치솟자, 마침내 포퓰리스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새로운 좌파 포퓰리즘의 의제는 구 좌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들마저도 30년 전보다 중도에 가까워진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했을 때도 실제로 펼친 정책은 이전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좀 다르다.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오스트리아의 자유당은 이미 주류 정치계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물론 모든 나라가 우파 포퓰리즘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에 우파 독재를 경험했던 스페인은 여전히 우파 포퓰리즘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우파 포퓰리즘의 극단을 경험했던 독일에서 독일대안당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다. 그리고 미국에선 트럼프가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트럼프는 단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달리 볼 근거가 많다.
정치학자 저스틴 제스트(Justin Gest)가 영국 극우정당의 공약(대량이민 중지, 미국의 일자리를 미국인에게, 기독교문화 보존, 이슬람위협 저지 등)을 미국의 백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런 정당이 있다면 지지하겠냐고 물었을 때, 무려 65%가 그렇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트럼프주의는 트럼프보다 오래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제스트의 결론이다.
새로운 포퓰리즘의 부상은 과거 포퓰리즘을 겪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과 한국 같은 선진국을 포함, 아시아에서는 포퓰리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좌파 포퓰리즘으로 홍역을 치른 남미에서도 지금은 포퓰리즘이 잠잠한 상태다. 반면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와 피파 노리스(Pippa Norris)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얻은 표는 2배,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얻은 표는 5배 늘어났다. 2020년이 되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은 유럽 전역에 걸쳐 의석의 13.7%를,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은 11.5%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연구 결과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정치에서 경제라는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정치는 여전히 큰 정부 지출과 높은 수준의 복지, 기업 규제를 정책의 골자로 하는 좌파와 작은 정부, 소극적인 복지, 자유방임을 추구하는 우파의 대결이다. 유권자들의 투표 경향을 봐도 대체로 노동 계급이 좌파를, 중상류층이 우파를 선택하는 구도가 기본적이다. 어떤 사람의 정치 성향을 추측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척도는 여전히 그 사람의 수입이다. 하지만 잉글하트와 노리스는 이런 투표 패턴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에는 계급 투표 경향이 영국, 프랑스, 스웨덴, 서독에서 최저치로 내려앉았고, 1990년대가 되자 미국에서는 계급 투표 경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경제적 지위로 사람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득 수준이 아닌 낙태나 동성결혼과 같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의견에 따라 공화당 지지, 민주당 지지로 갈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 각 당의 공약을 정리해보아도 1980년대 이후 경제 이슈의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 오히려 젠더, 인종, 환경과 같은 비경제 이슈의 중요도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