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여름이 바쁘다. 가을이 오기 전에 할 일이 많은 까닭이다. 그 중에도 여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게으른 식물들을 깨우는 것이다. 이미 절기가 입추를 지나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는 처서가 다가와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인데 뜨뜻미지근한 날씨에 절어버린 식물들은 이런 변화에 한없이 게으름을 부린다. 처서(處暑)의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처럼 하루가 다르게 낮은 짧아지고 차가운 밤이 길어지지만 겨우겨우 열매들을 맺느라 기력이 쇠해진 식물들은 쉬어가기만을 떼쓴다. 때는 어김이 없다. 그리도 유난한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건만 입추(立秋)를 지나 처서(處暑)가 다가오니 올곧게 내렸던 똬리를 슬그머니 거두고 말았다.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다는 말은 살아 숨을 쉬는 생물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절에게도 해당이 된다.
꼴짐은 무거운데 소는 뛰고 괴타리가 끊어져 바지춤은 흘러내리는데 천둥번개가 치는 상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여름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애꿎은 서산에다 눈을 흘기지만 바늘은 허리를 매서는 쓸 수가 없다. 순서에 따라 껍질이 생성되면 그 안에서 씨가 맺히고 양분을 흡수해 과육이 자라며 알맞게 커져서 열매가 된다. 어느 한 과정도 생략할 수 없으며 새치기를 하듯 약삭빠른 것은 그래서 쭉정이가 되고 만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은 봄의 탓이며 열매가 맺히지 않음은 그래서 여름의 탓이다. 이 탓은 가볍지 않다. 몰랐노라고 어물쩍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날카로운 추궁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동문서답으로 딴전을 피울 수도 없다. 사명(使命)이기 때문이다. 사명은 엄중하다. 핑계할 수 없고 회피(回避)할 수도 없다. 자연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섭리(攝理)에 의해 주어진 자연의 몫은 오직 제 몫을 다함에 있다.
섭리는 창조의 본질이다. 이것은 절대 뒤틀릴 수 없다. 만약 이것이 뒤틀려 봄에 꽃이 핀 뒤 가을이 곧바로 오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뜨거운 여름 뒤에 차가운 겨울이 오면 모든 피조물은 감기에 걸리거나 몸살을 앓게 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엉망진창을 초래하게 된다. 여름은 그래서 바쁘다. 여름의 몫을 다해 가을에 넘겨야하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창조의 섭리에 의해서만 반응하는 자연은 변명도 핑계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관리소홀로 빚어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응보로 대응(인과응보)한다. 엘리뇨 현상, 이상 기온 등이 그 대표적인 결과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에 대한 관리와 책임을 사람에게 맡기셨지만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천사도 흠모할 만한 그 놀라운 특권을 내던지고 말았다. 죄는 장성한다. 처음의 죄를 지은 뒤 사람의 죄는 날로 커져가고 대범해졌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교만이 죄의 원인이었음에도 사람은 회개를 몰랐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감만 못하기라도 하다는 듯 죄는 눈덩이처럼 커져서 이제는 창조의 영역까지 넘실대고 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 것이다. 사람이 짓는 죄의 대가는 엄정했다. 기근으로 아사자는 늘어났고 치료제가 없는 전염병은 시도 때도 없이 창궐했으며 그 모든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졌다. 죄의 삯이 죽음으로 보응된 것이지만 공동묘지에 핑계거리를 다 안겨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땅이 저주를 받은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틈에서 새싹이 돋게 하고 그것들이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의 식물이 되도록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에 대한 창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악몽과도 같던 찜통더위가 진절머리를 치게 해도 그 여름은 선한 열매를 품었기에 쉽게 그 앞자락을 가을에 내주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뒤처지고 낙오하는 식물들마저 포기하지 못한 채 성큼 다가서려는 가을을 밀어내며 서러운 뒷자락을 끌고 있다. 초가을을 늦여름이라 우기면서 따라오기 힘겹다며 허우적대는 식물들을 억척스럽게 감싸고 있다.
가을이 오기 전의 그 마지막 해 걸음에 뒤처진 여름이 긴 한숨을 쉬며 감싸 안은 것들을 풀어놓는다. 가물어 떨어진 땡감, 탄저병에 시달린 고추, 거친 바람에 멍이든 사과와 배, 자외선에 얼룩진 포도…. 그러나 얼룩지고 흠이 있는 것들이 야곱의 밑천이었기에 여름도 힘을 낸다. 올해도 가을이 오기 전에 풍성한 열매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기를. 가을에게 내줘야할 한 밑천을 뜨겁게 거머쥔 여름은 이제 귀뚜리라미를 타고 오는 가을을 거부하지 않고 맞는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울리는 그것은 그 무엇도 거부하지 못할 진리의 소리다. hanmac@cmi153.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