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신앙인” 자축파티로 끝나선 안돼

“무늬만 신앙인” 자축파티로 끝나선 안돼

‘2016 미국 대선 예비 경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존 경선과는 다른 특성들을 보여준다. 민주당에서는 과연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인지, 그리고 이제는 경선에서 탈락한 버니 샌더스 후보는 첫 유대계 대통령이자, 철저한 휴머니스트 즉 신앙을 갖지 않은 대통령이 될 지 초유의 관심사였다.

공화당 역시 정치 현장에서는 철저하게 아웃사이더였던 후보들의 약진이 있었다. 그 누구도 공화당 제일 후보로 도널드 트럼프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자신을 후원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를 등에 업고, 이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지명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민주, 공화 양당 후보의 종교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진다. 그만큼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신앙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진보와 보수로 양분된 미국 사회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로 봉합시킬 대통합의 리더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힐러리는 감리교인이며, 성경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치 현장에서 그녀는 철저하게 신앙과 정치를 구분한다. 반면에, 트럼프는 전형적인 사업가로서 신앙을 유권자들의 관심을 모으는데 이용하고만 있지, 정작 신앙과는 전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정치 전문지 ‘NPR’은 트럼프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신앙의 사람들이었던 미국 대통령의 신앙이 이번 선거에서 무시(?)될 수 있을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As Trump Defies Expectations Of Faith, Might We Be Entering A New Era?). 또한 트럼프 진영의 본진 세력인 ‘침묵하는 다수’의 실체를 같이 조명해준다(Trump Champions The 'Silent Majority,' But What Does That Mean In 2016?).

많은 통계나 연구들을 통해 미국은 점점 더 “포스트-크리스천 국가”가 돼가고 있고, 크리스천이 아닌 대선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이제까지, 미국인들이 크리스천 전통에 속하지 않은 대선 후보를 만난 것은 미트 롬니였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 리더들은 몰몬교인인 롬니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2016 대선을 맞아, 가장 강력한 비크리스천 대권 예비 후보는 바로 트럼프이다. NPR은 트럼프의 종교적 견해 즉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애매모호하고 연관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의 종교관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새로 대통령으로 탄생될 후보의 신앙관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대통령의 신앙이야말로 개인적, 국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의 종교적 성향은 선거에서 표심에 크게 작용해왔다. 미국인들은 대통령이 그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해 국가의 비전을 형성해가게 되고, 또 그 국가를 이끌어가며 정치적 입장 또한 종교적 신념에서 닦아나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신앙으로 유명한 토마스 제퍼슨이나 아브라함 링컨, 그리고 태프트 대통령 등도 선거기간 동안에 신앙이 없다는 것으로 공격 받기도 했었다.

이처럼 미국 역사를 보면 역대 대통령의 종교관은 논쟁의 대상이 돼왔다. 일부 경건한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대통령들, 특히 초기 건국 국부(國父) 가운데 무신론자나 비기독교인

반면에 세속적인 미국인들은 건국 국부들의 개인적 삶이나 정치적 삶에 있어서 종교가 미쳤던 영향력을 어떻게든 최소화시켜 말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중, 성경에 손을 대고 “하나님 도와주소서”라고 취임식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바로 링컨이다.

1865년 3월,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을 지켜본 신문기자는 지면에서 대통령 당선자가 오른손을 성경책 위에 올린 채 미국 헌법을 수호하겠노라 서약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를 앞에 두고 “하나님이시여 도와주소서(So help me God)”이라는 말로 선서를 마친 대통령은 몸을 숙여 성경책에 입을 맞추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미국 헌법에는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고 대통령이 특정 종교를 가져야한다는 법도 없지만 이 문구는 취임 선서를 마무리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대통령은 형식적으로라도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하며, 목사를 만나 조언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미국에서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어떤 종류든 도덕적인 기준이나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이지, 반드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러고 다트머스대학의 역사학자 랜들 발머(Randall Balmer)는 왜 미국인들이 역대 대통령들이 신앙의 사람이었는가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결혼만 세 번 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대통령의 종교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트럼프는 자기 인생에 용서란 필요 없으며, 예수는 “용감하다는 점에서”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독실한 감리교회 신자였던 부모님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진보적인 교회들과의 유대 관계도 강조하는 입장이다.

트럼프의 “비종교성”은 공화당 당원들에게 꽤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대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은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트럼프가 뉴욕에서 보수파 교회 관계자를 만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트럼프조차도 기독교인 표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비공개로 이루어진 이 회동에서도 트럼프는 신앙심과는 거리가 있는 어색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엄청난 신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정확히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교회에 빚진 게 많다”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가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모든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지 마시고, 모두가 한 특정 인물에게 투표할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트럼프에 대한 종교인들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다. 침례교 목사이자 패트릭헨리 칼리지의 총장인 마이클 페리스(Michael Farris)는 트럼프가 사업상에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사람들을 조롱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며, 성경이 설파하는 정직함, 품위, 고결함을 전혀 갖추지 못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가치를 전혀 중시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꼴”이라며 뉴욕 회동을 “기독교 우파의 종말”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랜들 발머 교수는 ‘2016 대선이 “이제 미국인들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전혀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트럼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실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트럼프 본인은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유세 현장에서 지지자들은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다.

“자기 할 일하고, 남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들이죠. 조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조르지 않아요. 사회운동가가 아니죠.” 아이오와 주 인디애놀라에 사는 패티 휴스의 말이다. 그녀의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일한 만큼 받아가려는 사람들이죠. 공짜를 원하지 않지만, 빼앗기는 것도 싫어합니다. 없이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요즘 그런 일을 당하고 있어요.”

재정 보수주의나,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과 같은 단체에 대한 반감, 국정 교착상태에 대한 환멸 등을 “침묵하는 다수”의 특성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트럼프 덕에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라는 개념의 역사는 꽤 길다.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리처드 닉슨이다. 닉슨 시대의 보수주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릭 펄스타인(Rick Perlstein)은 반전 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기인 1969년 11월, 베트남 전쟁을 옹호했던 닉슨의 연설을 주목한다.

“1969년 10월 15일, 미국에서는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남녀노소의 시민 2백만 명이 학업과 생업을 내려놓고 거리로 나와 반전 시위에 참여했죠. 닉슨 대통령 집권 초기의 허니문 시기가 끝나고, 반전 운동이라는 것이 주류 정치로 편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과 정부는 어떻게든 이 움직임을 ‘미국적이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어 평가절하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당시 닉슨은 연설에서 “특정 시각을 가지고 거리로 나와 자신의 시각을 나라 전체에 강요하려는 소수에 의해 국가의 정책 방향이 좌지우지된다면, 내가 미국 대통령으로서 했던 선서를 지키지 못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밤, 친애하는 미국 국민, 침묵하는 다수인 바로 당신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라고 선언했다.

펄스타인은 “침묵하는 다수”가 닉슨의 정치 철학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닉슨의 머리속에는 크게 두 종류의 미국 국민이 있었다. 한 부류는 하얀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집에 살면서 규칙을 따르고 세금을 잘 내며 시위 같은 건 하지 않는 보통의 평범한 중산층 시민이고, 다른 한 종류는 말하자면 왼쪽 사람들이었죠.”

이후, “시끄러운 소수”는 반전 운동가들 외에도 여러 집단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돼간다. 과격한 흑인 민권 운동가들에서부터 브라를 불태우는 페미니스트, 마약을 하는 학생, 락앤롤 밴드 등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모든 집단들을 포함하자, “소수”의 규모는 상당히 커진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의 3분의 1 이상이 65세이므로, 상당수는 닉슨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펄스타인은 “침묵하는 다수” 담론에 인종주의적인 면도 숨어있다고 설명한다. “다수가 있다면 소수가 있는 거고, 미국에서 소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죠.”

물론 2016년 트럼프 지지자들은 시대가 1960년대와는 달라졌고, “침묵하는 다수”라는 말에 인종차별주의적인 뜻은 없다고 항변한다. “트럼프의 회사를 보세요. 다양한 인종을 고용하고 있잖아요.” 웨스트드모인에 살고 있는 지지자 조지 데이비의 말이다. 데이비는 오늘날의 “침묵하는 다수”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강요하는 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도 그가 정치적 올바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죠.” 데이비는 처음에 특정 집단에 대한 괴롭힘 금지(anti-bullying)에서 출발한 개념이 지금은 너무 과도해져서 이젠 말 한 마디 잘못하는 것으로 직장을 잃을 수도, 고소를 당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됐고, 이는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데이비가 말하는 “침묵하는 다수”가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는 게 펄스타인의 설명이다. “침묵하는 다수란 박탈감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 공기 중에 녹아나오는 것이죠.”

결국 ‘침묵하는 다수’는 상대적 박탈감을 트럼프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예비 경선에서 고공 행진을 보인 트럼프 인기의 원인은, 바로 무엇인가 잃고 산다고 사는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거침없는 입담과 돌발 행동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고, 정치적인 구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