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목사 (달라스 웨슬리연합감리교회 담임)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 어떤 소원을 가지고 일천 번제를 드렸을까?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도 제목을 가지고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감사해서 드린 제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이고, 그에게 소원을 물어보셨던 것이다. 그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반드시 구하는 것이 있다.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정말 솔로몬이 구한 것이 지혜였을까?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일까? 개역한글에는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다고 되어 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그러나 개역개정에는 조금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혜로운 마음과 듣는 마음은 의미상 많은 차이가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 히브리어로는 레브 쇼메아(leb shomea)라고 되어 있다. 직역하면 ‘듣는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지혜로운 마음’으로 옮겨진 성경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구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듣는 마음’이었다. 그가 구한 것은 지혜롭고 총명하고 명철하고 명석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왜 ‘듣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했을까? 그는 왕이었다. 왕으로서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듣고, 사리 판단을 잘해서 바른 길로 백성들을 이끌기 위해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왕으로서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재판도 해야 하는데,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말을 잘 듣고 바로 판단하고 판결하기 위해서 ‘듣는 마음’을 구했던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 ‘듣는 마음’을 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 아니한 다른 축복들도 덤으로 받았던 것이다.
왕이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듣지 아니하면 나라를 잘 이끌 수가 없다.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잘 듣는 것이다. 잘 듣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결정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었다. 어리석은 자는 들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다. 잠언(18:17)에도 피고의 말을 들어 보기 전까지는 송사자의 말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듣기도 전에 말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교만한 자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혜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이다. 잘 들어야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잠언에는 “내 아들아, 들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지혜는 들음에서 나온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지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듣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들어만 주고 돈 버는 사람들이 있다. 카운슬러들이다. 잘만 들어줘도 환자들이 치료받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지도자는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듣는 마음’, 다시 말해 ‘들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솔로몬은 바로 이것을 구했던 것이다. jinhlee1004@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