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목사 (달라스 웨슬리연합감리교회 담임)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시39:3). 다음은 어떤 저자가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사실을 그의 책에 기록한 것이다.
믿음의 고백에는 단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돼지가 구정물을 먹는 것처럼 말씀을 그렇게 먹는다. 돼지는 음식물을 거의 씹지 않고 삼켜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처럼 급하게 읽는다. 몇년 전이었다. 나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성경을 읽고 있었다. 시편을 읽다가 39편에 이르자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그 좋은 커피 향도 사라져 버렸다.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희미해져 갔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이 말씀뿐이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계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선포)..(시39:3). 이 심오하지만 짧은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단 세 마디만 하셨다. 계시, 묵상, 선포. 나는 보았다! 마치 빗줄기가 내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그분은 먼저 계시가 오고, 그 다음에 묵상이 온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당신은 계시를 경험하고 묵상을 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믿음으로) 선포할 준비가 된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고백이 개인적인 개시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침받고, 번영하고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복에 대한 계시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복을 묵상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이들의 고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이 구절이 어느 날 계시처럼 그에게 다가왔으며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셨다고 흥분하면서 고백하고 있다. 정말 그 깨달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일까?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일까? 그 책의 저자는 계시가 임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계시가 와서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이 시편의 문맥을 살펴보자. 1-2절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입에 재갈을 먹이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입을 열면 불평과 불만, 원망이 터져 나올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화가 나 있다. 걱정거리가 있다. 그런데 웬 계시인가? 계시가 임해서 기쁘고 즐거워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아니다.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묵상하는데 왜 화가 날까? 여기 화는 그런 화가 아니고 불을 말한다. 묵상할 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처럼 계시가 임하고 그 계시를 깨닫고 마음에 불이 붙은 것일까? 이 구절을 앞뒤 싹뚝 잘라버리고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위의 저자는 이 구절을 말씀 묵상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런 해석을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었다고 자신 있게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깨달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 깨달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 이 시인이 지금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중일까? 아니다. 말씀이 아니라 그의 문제를 ‘묵상’하고 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있다. 묵상과 염려는 같은 과에 속한다. 말씀을 묵상하면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묵상이 되고, 문제를 묵상하면 그것은 염려가 된다. 이 시인은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화가 나게 하는 것을 묵상하고 있다. 그 사람 혹은 그 문제 혹은 그 일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더 화가 치밀어 올라 속에서 더욱 열불이 났던 것이다.
“나의 혀로 말하기를” 위 책의 저자는 계시가 임하고 그 계시를 묵상한 다음 묵상한 것을 이제 선포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대로 계시가 임한 것도 아니고, 말씀을 묵상한 것도 아니다. 또한 시인이 말씀을 선포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앞에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을 받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결심이 무너진다. 그리고 내가 죽어도 이 말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주님, 알려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나로 어리석은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채찍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의 손으로 나를 치시면, 내 목숨은 끊어지고 맙니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다시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에게 눈길을 단 한번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시 39:4-13, 부분적 인용).
위 책의 저자는 계시를 받아 기쁘고 즐거워 그것을 깊이 묵상하고, 묵상한 것을 나가서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 반대다. 이 시인은 지금 낙심할 대로 낙심한 가운데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낙망한 가운데 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매달리고 있다. 입을 열어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을 앞뒤 싹뚝 잘라버리고 이 구절만 가지고 보면 계시에 관한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을 새번역은 그 의미를 살려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움만 더욱 커져서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어떤 영어 성경이나 한글 성경에서도 이런 식을 번역한 성경은 없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가장 잘 살린 번역이다. 이런 기가 막힌 번역을 한 역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jinhlee1004@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