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迫害)를 딛고 선 위그노( Huguenot)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직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삼복더위에 마스크를 써야 하는 이 실상은 현대인의 불행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목회와 선교현장은 코로나 광풍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뚜렷한 대안이 없다. 이렇게 앞이 안 보일때 우리는 역사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논어에는 온고이지신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 말이 있다. 즉,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이는 스승이 되기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우리가 꼭 눈여겨봐야 할 사례가 있다. 그것은 16~18세기, 프랑스에서 살았던 위그노(Huguenot)이다. 저들은 102년 동안 가톨릭교회, 귀족, 왕이 결탁된 국가권력의 박해아래 있었다. 위그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투쟁했다. 그 여파로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일부는 세계로 흩어져야 했다. 저들은 가는 곳마다 신앙뿐 아니라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펜데믹 시대인 지금 21세기 목회와 선교는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봉착해있다. 돌파해 갈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일까? 그것은 치열하게 살았던 위그노의 삶과 정신을 본받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거침이 없을 것이다.

 

고난과 함께 한 위그노의 역사

 

위그노(Huguenot)라는 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 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eunot)가 되었다. 위그노라는 말이 프랑스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60년부터이다. 프랑스 개신교는 앙리 4세에 의한 낭트칙령(1598)으로 잠시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1685년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였고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발표했다. 이로서 87년간의 자유를 마감하고 이후 102년간의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교회사가들은 1685~1787년 까지를 고난의 광야교회시대’라고 부른다. 그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바시학살(1562), 위그노전쟁(1562~1598), 성바톨로매 대학살(1572)이었다. 일종의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에 저들의 예배 처소가 파괴되거나 불탔다. 외국으로 도피하지 못한 목사와 설교가들은 잡혀 죽거나 노예가 되어 평생 배 밑창에서 노를 저어야 했다. 많은 이들이 강제로 개종을 강요당했고 끝까지 개종을 거부할 경우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파리 에펠탑이 세워진 곳이 순교한 위그노를 묻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위그노를 대표한  마리뒤랑(Marie Durand)

 

마리뒤랑은 프랑스 위그노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가족은 개신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광야교회 목사였던 오빠인 삐에르 뒤랑은 32살 나이에 몽펠리에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재판소 서기였던 아버지 에티엔 뒤랑과 어머니도 1729년에 체포되어 14년 동안 갇혀 있다가 죽임을 당했다. 마리 뒤랑은 1730년 7월 19살 나이에 프랑스 남부 콩스탕스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면서 38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다. 마리 뒤랑은 그 곳에서 죄수들을 돌보며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녀는 감옥의 물을 길어 올리는 구멍 주위에 “레지스테 (R?sister)” 글을 새겼다. 그 뜻은 저항하라는 것이다. 비 진리에 저항하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복음을 위해 저항하라는 말이다. 그녀가 돌에 새긴 레지스테는 이후 프랑스 개신교인들의 영혼에 새겨졌고 그들의 좌우명과 정체성이 되었다. 이렇게 레지스테 정신으로 무장한 신도들은 양심의 자유를 따라 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세계로 흩어진 위그노

 

위그노의 망명은 1572년 8월 24일에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돌로매 대학살 사건으로 촉발했다. 더 이상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며 살기 어렵게 되자. 저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인구 1800만 명중 개신교 인구는 11%인 200만이었다. 그중에서 100만 명의 위그노가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독일로 간 위그노는 베를린에서 엘리트 계층이 되었고 제조업과 기계 산업을 육성하였다. 네덜란드로 간 위그노는 무역업을 일으켰다. 영국으로 간 위그노는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스위스로 간 위그노는 정밀시계산업과 금융업과 사회봉사 기관을 세워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간 위그노는 현재 “유레이즈미업”이라는 최상급 포도주 산업을 일으켰다. 미국으로 간 위그노는 예술가와 엔지니어 등 지성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지도층이 되었다. ko.wikipedia.org 자료에 의하면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포함한 8명의 미국의 대통령들이” 저들의 혈통을 가졌다. 이렇게 프랑스 위그노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나라와 도시마다 산업이 발전하고 번영을 이르며 역사의 전환을 이룬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들은 ‘칼뱅의 후예들로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해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이다(성원용 목사 “위그노처럼” 책). 

위그노는 16~18세기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일컬음이다.

저들은 긴 세월동안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냈다.

교회가 위그노의 삶과 정신을 본받는다면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위그노의 대표적 정신

 

첫째는 망치와 모루의 정신이다. 이것은 고난을 상징한다. 저들은 망치와 모루 사이에 놓여서 으깨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위그노가 가장 순수하고 생명력이 넘쳤던 순간은 십자가의 고난을 가운데 있을 때였다. 저들은 그 속에서 더욱 정화되고 단련되며 강해졌다. 둘째는 레지스터 정신이다. 레지스터(Resister)는 개신교 신자들의 좌우명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레지스터는 위그노의 정신을 이어간 현대사의 자존심을 지켜낸 레지스탕스(Resistance)의 유래가 되었다. 저항정신은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늘 살아 있다. 이 정신은 1789년 부패한 왕권에 맞섰던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고, 20세기에는 나치의 불의에 저항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다시 살아났다. 셋째는 톨레랑스 정신이다. 톨레랑스(Tolerance)는 관용이라는 말이며 라틴어 ‘tolerare’에서 왔다. 루이 16세는 1787년 11월 7일 베르사유 칙령을 내렸다. 이것을 톨레랑스 칙령이라고도 부른다. 이 칙령의 발표로 프랑스에서는 실제적으로 관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인종,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필요한 사회적 가치는 톨레랑스의 정신이다.

 

맺음 말

 

역사에는 “만약(IF)”라는 말이 없다. 그것은 과거 행적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인간실존은 현재형이다. 따라서 가정을 하며 상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만약에 이런 탄압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탁월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프랑스 위그노 학자인 “사무엘 무르”가 한 말이다. 위그노는 16~18세기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지금도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 위에 두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정신적 유산을 잇겠다는 뜻이다. 마치 초대교회 카타콤의 성도들처럼 그들 조상이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어떤 유혹도 거절하며 죽음 앞에서도 신앙적 절개를 꼿꼿이 지킨 것에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한인교회와 크리스천들도 심령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위그노의 순결, 열정, 헌신, 희생 정신이 불꽃으로 타 올라야 하지 않을까? 예배당에 안에만 갇힌 신앙은 죽은 것이다. 우리도 저들처럼 삶의 자리 어디에서나 복음을 온 몸으로 살아낸 믿음의 산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jrsong007@hanmail.net

0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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