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우크라이나에 포성은 언제나 멈출 것인가?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벌써 달포가 넘었다. 뉴욕타임스(3월16일자)는 전쟁 개시 이후 3주간 동안 러시아 군인 사망자만 7000명 정도라고 추정했다. 공격 측이 이 정도라면 방어 측의 피해는 얼마나 될까? 인적, 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에 의하면 3월 21일까지 3,557,245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이는 그 나라 4천300만 국민 중 8%에 해당된다.
문제는 아직도 전쟁이 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할진대 새벽이슬 같은 청춘들이 저렇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하는가? 불이 난 곳에는 탁상공론이 필요 없다. 우선 시급한 것은 더 이상 살상이 없도록 불부터 끄는 것이다. 너의 집, 나의 집을 가릴 때가 아니다. 그래야 사람이다. 독일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지성인들이 추모하는 본회퍼는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는 용감했다. 거대한 어둠의 세력 앞에 불꽃처럼 자기 몸을 던져 산화했다. 행동하는 신앙과 양심은 이렇게 후대에까지 울림을 준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불의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성의(聖衣)를 입고 예배당에서 기도만 해도 되는 것인가? 참된 기도는 행동을 수반한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은 무장투쟁은 배격하되 선한 방법으로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멈추도록!
1. 로잔언약에 언급된 교회의 사회참여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은 1974년 7월 16-25일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채택된 내용이다. 당시 의장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였으며 150여개 국가에서 3,700여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문건은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가 기초했다. 당시 세계의 각 언론들은 “20세기에 가장 의미 있는 크리스천 선언 가운데 하나”라고 칭송했다.
이 언약은 총 15개항이다. 제5항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을 언급하고 있다. 그 핵심은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요,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억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불의가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이것을 고발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2. 나치(Nazi)하에서 침묵했던 교회들
나치 하에서 독일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대다수의 교회들은 교파를 떠나 나치에 대해 지지하거나 침묵을 하였다. 당시 독일교회는 상당히 교권주의적이고 제도화되어 있었으며 교역자는 마치 공무원과 같았다. 교회는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복음의 생명력은 없었다. 그러던 중 히틀러가 “우리가 교회를 보호해줄 테니 나치를 지지해주고, 나치가 하는 정책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따라 달라”라고 요구했다. 이에 개신교나 가톨릭은 두말없이 순응하였다. 엄혹한 시절 감히 누가 대항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독일교회는 애국주의 광풍, 반유대주의 광풍에 똑같이 휩쓸렸다.
하지만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년)을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the Confessing Church)는 신앙양심 상 동조할 수 없었다. 저들은 성육신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굴복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바로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들은 죽거나 투옥되고 자격을 상실 당했다. 본회퍼 역시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에서 알몸으로 벌거벗겨진 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나이 40세였으며 히틀러가 죽기 1주일 전이었다.
교회는 구름처럼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아픔을 외면한 교회는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다.
크리스천은 세상 향한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3. 불의에 항거하지 않는 러시아 교회들
우크라이나는 현재 65%가 동방정교, 15%가 가톨릭, 3%가 개신교(http://churchtheway.com›home)로서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비율이 83%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는 기독교 74%(동방정교회 73.62%, 기독교 0.33%, https://www.glocaldn.com›profiles)이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교가 모두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실제 국민의 사상·문화·풍속 등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두 나라는 오랜 기간 한 국가 통치 속에 있었기에 혈연, 지연, 학연과 종교적으로 얽혀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동족이나 비슷한 형제들끼리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우는 것이다. 지금 한 시가 급한 이때에 종교 지도자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색창연한 성당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관례적인 미사만 드리고 있지는 않는가? 특히 러시아정교회의 지도자들은 왜 이렇게 조용한가? 설마 나찌 하의 독일교회를 모방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세계의 기독교회는 어떠한가? 혹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엿보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마저 침묵한다면 하늘의 뜻을 누가 펼칠 것인가?
4. 불의한 전쟁 앞에 교회가 해야 할 일
“마차가 사람을 치어서 다치게 했다면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주려고만 하지 말고, 마차의 바퀴에 뭘 끼워서라도 굴러가는 마차를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나찌 하에서 저항했던 독일 고백교회인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세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외에도 크고 작은 분쟁들이 있다. 시리아 내전, 예멘 위기, 아프가니스탄 갈등 등이다.
고집 세고 냉혈적인 군왕들은 인명을 우습게 여긴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주변의 나라들도 자기 안위만을 우선시 하며 도우미 역할을 하는 데 몸을 사리고 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세상에 소망이 없을 때 교회가 나서야 한다. 그 방법은 철저히 비폭력이어야 한다. 물리적 대항은 더 큰 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의 1만여 성직자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우크라이나로 가 광장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3일만 금식 기도한다면 하늘이 진동하지 않을까? 18억 무슬림들은 매일 5번씩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기도하고 있다. 천주교, 동방정교, 기독교도를 합치면 24억이다. 전 성도들이 우크라이나-러시아를 향해 하루에 한 번씩만 정한 시간에 통성으로 기도한다면 뭔가 사인이 보이지 않을까?
맺음 말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불의가 판을 친다. 하늘의 평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셨다. 세상향한 교회의 책임은 준엄하다. 그것은 선지자적 음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한 지체인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세상을 향해 평화의 사자들로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불의 앞에서는 대동단결해 대항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타협이나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를 살더라도 부끄럽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둠의 세력 앞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동조자들인가? 방관자들인가? 아니며 저항자들인가?
jrsong007@hanmail.net
04.0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