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2022년 새해 벽두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지구촌 곳곳에서 돌고 있다. 단체들, 기업들, 파당들, 국가들이 생존을 넘어 더 큰 이권과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거나 대치 속에 있다. 인류가 똘똘 뭉쳐 코로나바이러스를 퇴치한다 해도 힘이 버거운데 이렇게 힘이 국지적으로 분산되니 안타까울 뿐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 이면에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어왔다. 이는 군중보다 지도자들의 책임이 막중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적 소수가 세상을 이끌어갈 때 그 역사는 흥하게 되고 지배적 소수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 멸망이 온다.” 오늘의 시대는 어떠한가? 세계 여러 나라와 국내의 크고 작은 단체들의 내부구조를 들어다보면 절대 다수가 창조적 소수보다 지배적 소수들이 카르텔(Cartel)을 형성하며 하늘 높은 줄을 모르며 살고 있다. 이로서 세상은 어지럽고 애꿎은 백성들은 삶의 무게에 한 없이 눌리고 있다. 이로서 인간이 속해 있는 (세상 곳곳의) 국가와 기관들마다 신앙을 표출할 수 있는 담대한 선량들을 기다리고 있다. 진정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시대의 아픔을 체휼한 채 세상을 선도할 일꾼들은 어디 있는가?
세상사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창조적 소수란 바닷물에 녹아있는 2.8%의 염분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크리스천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창조적 소수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
1. 창조적 소수에 대한 토인비의 생각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인류의 역사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갈파했다. 그는 1934년부터 1961년까지 28년에 걸쳐 완성시킨 대작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이란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모든 문명과 문화는 고난을 이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결과물이다. 한 문명의 흥망성쇠는 그 사회를 이끌고 있는 창조적 소수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란 문명을 쇠퇴하게 하는 도전의 기미를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고 이에 올바로 응전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일깨우고 극복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위협적인 도전에 부딪칠 때마다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응전을 펼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토인비가 말하는 역사의 도전이란 무엇일까? 홍수나 가뭄, 혹한, 지진 등과 같은 자연환경의 격변일 수도 있고 빈부의 격차나 도덕적 타락, 지도계층의 지도력 상실, 민족의 대이동과 같은 사회 환경의 격변일 수도 있다.
2. 창조적 소수가 경계해야 될 일
인간의 역사는 생물과 같다. 끊임없는 도전에 변화를 거듭한다. 만일 밀려오는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면 크고 작은 문명이나 문화, 집단들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창조적 소수가 타락하여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 요인은 외적인 요소보다 내적(內的)인 것이다. 이는 “휴브리스(Hubris)”라는 헬라어에서 연유한다. ‘휴브리스’의 의미는 오만, 자만, 신(神)들에 대한 불손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ies)’가 이미 이룬 성공과 거기서 주어지는 기득권에 안주하여 자기도취 및 안일에 빠져 오만해지면 그때부터 행세하는 집단인 지배적 소수(Dominant Minorities)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배적 소수자(Dominant Minority)는 누구일까? 역설적이게도 창조적 소수자가 타락한 사람들이다. 창조적 소수자일 때의 사명감과 순수성을 상실한 채 오직 기득권에만 연연하는 자가 바로 지배적 소수자이다. 문제는 창조적 소수가 사라지고 지배적 소수가 그 사회의 방향타를 잡을 때 결국 그 사회와 집단은 쇠퇴를 넘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류는 역사이레로 나라들과 크고 작은 문명권마다 지배적 소수들이 똬리를 틀고 주저앉아 막강한 권세로 세상을 어지럽게 해왔다. 그렇게 버티다가 종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은 자들이 한, 둘인가?
3. 창조적 소수에 대한 사례
바닷물의 염분농도는 평균 2.8%로 알려져 있다. 3%도 채 안 되는 적은 양의 소금기가 온 바다를 정화하면서 무수한 해양생물들을 살아 숨 쉬게 한다. 사람들의 인생살이도 자연생태계의 구조와 그리 다를 바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 시대마다 바닷물의 염분과 같은 창조적 소수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다수의 오해와 핍박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키려 애썼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마틴 루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생명을 걸고 로마가톨릭 교황청에 고독한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때 국교통일령(國敎統一令)이 내려지자 청교도들은 미 대륙으로 건너가 성경 위에 오늘의 미국이 세워지도록 기초를 놓았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위해 한 몸을 초개같이 던진 창조적 소수들이 있었다.
시대와 교회의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아모스 같은 예언자들과 세례요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그러했다. 아니, 이렇게 이름난 인물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조직체 안에서 빛과 소금된 역할을 한 창조적 소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4. 창조적 소수를 필요로 하는 세상
금년 3월 9일에는 대한민국에 20대 대통령선거가 있다. 이번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후보들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다. 필경 저들 중 한명은 당선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선 이후이다. 과연 대한민국을 저 정도의 사람들에게 맡겨도 될 것인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이나 여타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핵심을 들여다보면 지도자들의 자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한계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택할 때 비전과 실력과 덕망을 참고삼아 뽑아야 한다. 사소한 이권이나 인간관계에 맺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할 때 그 후유증과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떨어지게 된다.
문제는 이 세상은 어느 사회 영역이든 적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포진해있다. 헌데 저들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창조적 소수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각종 사건사고 및 부패의 먹이사슬 이면에는 버젓이 크리스천들이 있음에 우리는 놀라곤 한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존재 자체가 소금인데 만일 그 역할을 못하면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실제로 이 말씀처럼 적지 아니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고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맺음 말
창조적 소수란 공동체 역사의 선한 진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이는 비전과 열정의 소유자이며 주인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공익을 앞세우며 모든 고난과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응전(應戰)하는 사람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역사를 돌아보면 샛별처럼 창조적 소수로서 세상을 밝게 비추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일 루터가 없었다면 과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까? 만일 청교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국이 탄생되었을까? 만일 주님께서 대중적인 사역만 하고 그 제자들을 키우지 않았다면 과연 사도행전이 기록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역사의 능선마다 창조적 소수들의 헌신과 숨결이 묻어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거대한 크루즈선(Cruise ship)이 움직이는 것은 수많은 승무원과 승객이 아니고 선장과 항해사 등 몇몇의 핵심 리더가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도도하다. 그 물줄기 아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각자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하면 창조적 소수로서 쓰임을 받는 것이다. 나아가 눈앞의 업적이나 물량적인 수치보다 장래를 내다보며 교회와 국가와 민족을 이끌 인물들을 키워야 한다. 그 핵심은 사람을 얻어, 사람을 길러,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02.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