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국의 열쇠”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본 작품은 종교적 배경을 깔고 있으나 뛰어난 문학성으로 인하여 불신자들에게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이 장편소설은 1942년 A. J.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의사였다. 스코틀랜드의 덤버튼에서 출생하였으며 의학을 전공한 후 해군 군의관과 탄광 의사를 지냈다. 그 후 개업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나 소년시절부터 꿈꾸어왔던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그는 주로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썼다. 여기 “천국의 열쇠”는 작가가 성장하던 때의 종교적 갈등과 자기 생애를 배경으로 하는 자전적 성격이 짙다. 그는 생생한 인물묘사와 극적인 플롯(Dramatic Plot), 종교적 정신에 입각한 휴머니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 핵심은 주인공인 “프랜치스 치셤과 그의 친구 안셀모 밀리”라는 주교의 삶을 대조함으로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며 천국의 열쇠를 쥘 수 있는가를 독자로 하여금 판단하게 한다.  

 

1. 주인공의 인생

 

이 책은 주인공 치셤 신부의 회고담으로 시작된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신학교로 들어갔다. 치셤은 주위의 냉대 속에 간신히 신학교를 졸업하고 보좌신부로 몇 군데의 성당을 거치나 주임신부와 화합하지 못했다. 이로서 로마 해외포교단에 의해 그는 중국에서도 오지인 절강성 파이탄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주인공은 선교지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페스트가 유행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다. 내전, 무서운 기근, 비적들의 노략질 등을 견뎌냈으며 성당을 재건하고 학교를 세웠다. 

모진 세월을 지나는 동안 치셤 신부는 총탄이 남긴 흉터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절름발이 노인으로 변했다. 결국 그는 사역에 대한 선교부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은퇴명령에 따라 실패자의 모습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작별하던 날 수많은 신도들은 찬송가를 합창하고 폭죽을 터뜨리며 꽃가루를 뿌렸다. 배가 서서히 부두를 떠나게 되자 선교사는 35년간 정들였던 파이탄 마을을 보며 일동을 향해 손을 들었다. 노신부의 얼굴은 어수선하게 뒤틀어지고 뺨에는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흘려 내렸다.  

 

2. 천국에 대한 작가의 생각 

 

본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천국 이해는 김영웅의 책과 일상에서 잘 언급해 놓았다. 내용인즉 그것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이해하는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나 철학,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현세를 등지는 듯한 장소를 떠올린다면 더 큰 왜곡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천국은 보다 넓고 풍성한 의미로써 개인의 종교관, 철학관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질문하고 사유할법한 인간다움이나 바른 삶과 같은 보편적인 의미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C. S. 루이스가 말했던 도덕률이 조화롭게 지켜지고 구약성서에서 강조되는 정의와 공의가 순조롭게 행해지는 세상, 사람답게 살만한 세상, 살고 싶은 세상을 떠올리는 편이 이 작품 속 ‘천국’의 이미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무튼 작가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간접적으로 질타한다. 인류는 국가나 인종, 종교가 다르다거나 사상,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고 오직 참사랑과 평화 속에 만날 수 있는 화합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종교의 형식적 계율에 구속당한다면 오히려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

 

3. 천국의 열쇠를 쥘 수 있는 사람

   

프랜치스 치셤과 안셀모 밀리는 같은 고향 친구였다. 그들은 신학교를 거쳐 신부가 된 이후에도 표면상 성직자로서의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으나 삶의 궤적은 교차하는 두 수직선처럼 커져만 갔다. 

프랜치스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외모는 작고 바짝 말라 볼품이 없었다. 치셤은 신학생 시절부터 남들과 사뭇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는 좌천격으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선교사를 은퇴할 무렵 치셈은 얼룩투성이의 때가 낀 남루한 옷차림, 뺨에 남은 깊은 흉터와 거칠어진 외모, 선교기간에 입은 골절상의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패배자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밀리는 정 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유복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반장 노릇을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주도면밀한 대인관계와 화려한 언행으로 출세의 계단을 요령 있게 밟고 올라갔다. 그는 가톨릭에서 주요한 보직을 거쳐 주교 자리까지 단 한 번의 뒷걸음질도 없이 승승장구했다. 그는 한마디로 위엄과 품위를 갖춘 성공한 신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이 둘 중 누가 천국의 열쇠를 쥘 수 있을까?   

 

만일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질까?

주인공 치셤은 산술적 수치로 보면 실패한 선교사에 해당된다.  

작가는 화려하고 출세지향적인 사역자를 무언중에 질타하고 있다.

 

4. 작품에 대한 평가

   

이 소설은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유의 다면체 모습을 통해 현재 우리들에게까지 닿아 공명을 일으키게 한다. 작가는 가톨릭 사제인 치셤을 성화된 인간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반항기 어린 소년, 열정적인 청년, 다정한 노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미소 짓게 만들고 때로는 조용한 감정의 파도를 타며 가슴 아파 흐느끼게도 한다. 그는 고투의 삶 끝에서 “내 평생 단 한 번의 소원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한다. 하나님은 신다운 사제보다는 사람다운 사제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신념에 찬 자기 확신으로 인류의 동포애를 주장하고 있는 크로닌의 신앙은 박제된 교리로 비인간화 된 사역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고 있다. 진정 이웃사랑 없는 신앙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휴머니즘 차원에서 선행과 그리스도로 인한 사랑의 실천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겉모양새를 비슷할지라도 동기와 지향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작가의 천국관은 현대의 유행하는 다원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서로 종교가 다르다고 경쟁하며 얼굴 붉힐 필요가 있는가?” 아무리 문학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절대 진리를 훼손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다. 천국은 인간의 덕과 선행이 있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신약 신학자 GE Radd에 의하면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 통치가 드러나는 그 자체”라고 했다. 따라서 본 쟁점(Issue)은 문학 장르로서 수용할 수 있다 해도 신학적 해석으로는 접수할 수가 없다.

 

맺음 말

 

이 작품은 선교사의 전기가 아니라 작가의 이상향이 담긴 소설이다. 그렇다할지라도 우리는 주인공을 통해 진정한 성공과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바라보는 안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누가 성공한 목회자요, 선교사인가?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적 구조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안달이다. 문제는 정치판처럼 자기 출세를 위해 참세 떼처럼 양지만을 쫒아 다닌 사역자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선교에서 성공이란 없다. 승리가 있을 뿐이다.  무엇을 이루었느냐 보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공동체 속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인공 치셤처럼 자유함을 누리며 올곧게 살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인내와 청빈과 용기로 일관하고 관용과 미덕으로 이웃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표출함이 마땅하다. 천국의 열쇠는 전능자의 소관이지만 그래도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위엄, 품위, 권세를 대표하는 밀리 주교보다 겸손, 소박, 진정성을 대표하는 치셤 신부에게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jrsong007@hanmail.net

 

1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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