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이다. 구원은 헬라어로 소테리아(σωτηρία))이다. '소테리아'는 '영혼구원'을 넘어서 전인구원을 뜻하고, 개인구원을 넘어서 사회구원에도 사용된다. 우리는 헬라적인 이원론에 익숙하여 이 둘을 분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별개의 문제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동전의 양면성과도 같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 보수와 진보의 시각차가 크다.
복음주의 계통에서는 교회선교를 말씀의 선포와 개인의 영혼구원에 집중시켜왔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전통적인 이 개념은 사회참여(Social action)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반발과 도전을 받아왔다. 사회구원에 관한 쟁점은 20세기 후반기에 에큐메니컬 운동에 의해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양 극단의 노선은 로잔대회에서 통합적으로 잘 정리되었다. 아무튼 우리는 흑백논리로 다른 진영을 판단하기보다 말씀과 교회의 선교역사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보수와 진보의 두 노선
대체로 보주주의 노선에서는 “그리스도적 구원이란 개인영혼의 구원이며 이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 건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견해이다. 사회개혁은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성령을 받게 되면 사회전체가 자동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개혁은 특별히 소명 받은 전문가들이 할 일이고 교회는 다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곳만으로 충분하다는 태도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는 영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를 사회 밖의 종교로 만들고 사회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한 경향이 있어왔다. 이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비해 진보주의 노선에서는 개인의 영혼구원을 소홀히 하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사회의 죄악을 규탄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사회정의를 위해 신앙의 행동화를 지나치게 강조했다.
사회구원의 우선론자들은 각 개인이 착해지면 사회가 자동적으로 선해진다는 견해에 대해 순진한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사회구조 악은 개인의 합보다 더 큰 힘을 갖기에 영적 행보만으로는 한계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진보주의 노선은 사회참여로 영향력을 드러냈지만 정작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을 훼파하는 일반 사회단체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2. 구원 사역에 대한 역사적 이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주님은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셨다. 정당을 형성하거나 정치인으로서의 생애를 거절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8세기의 웨슬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부흥운동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운동을 활발하게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19세기 미국에서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선교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회의를 기점으로 새로운 물줄기를 타게 되었다. 로잔언약의 핵심은 “사람과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이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활동은 복음전파의 결과인 동시에 복음전파에 이르게 하는 다리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로잔대회에서는 양극화된 두개의 극단적인 견해를 통합적으로 정리해주었다. 존 스토트 목사에 의해 주도된 로잔언약은 개인구원을 우선하되 그리스도인의 사회책임을 무겁게 거론함으로서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명료하게 제시해 주었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 속에 있다.
교회는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되 사회변혁을 위해서도 역할을 해야 한다.
3. 칼빈의 사상
칼빈의 정치사상은 16세기 유럽의 정치상황과 무관치 않은데, 국가가 종교에 예속됐던 중세와 이원론적 세계관의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나왔다. 한 마디로 교회와 국가의 유기적 관계, 즉 국가와 교회의 통치영역을 구분했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통해 국가는 교회의 예배를 보장하고, 교회는 국가가 바른 길로 가도록 충고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을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복종을 우선시하는 친정부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칼빈의 정치사상이 후대에 가장 모범적으로 구현된 사례는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때라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화란의 소시민과 상인들에 의해 주로 수용돼 독립전쟁에도 깊이 관여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사실상 칼빈주의 국가가 됐다. 여기서 카이퍼는 ‘영역주권사상’을 통해 정치와 교육 등을 개혁했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4. 라인홀드 니이버(R. Niebuhr)교수의 생각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요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R. Niebuhr)교수(1892,6.21-1971,6.1)는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 참된 기독교는 두 가지 차원의 건전한 조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차원이며 둘째는 이웃을 향한 수평적인 차원이다. 전자는 종교와 신앙, 후자는 윤리와 사회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참 기독교는 종교와 윤리, 신앙과 행위, 정신과 물질의 건전한 조화 속에서 성립된다고 강조했다. 40여 년 전에 니이버 교수의 이런 주장은 그 당시에 미국사회 안에 영적인 신앙만 강조하고 현실을 외면했던 정통의존사회와 또 이웃에 대한 현실문제만을 강조함으로써 뜨거운 영적 힘과 신앙을 잃어버린 진보적인 교회를 향해 다 같이 던진 개혁의 선언이었다.
참 기독교는 그의 주장대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즉, 기독교는 종교이면서 종교만은 아니며, 윤리이면서 윤리만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즉 영원과 시간, 절대와 상대, 무한과 유한, 완전과 불완전의 만남이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만 생각할 때 이웃에 대한 봉사와 현실참여가 무시 된다. 또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로만 생각하면 모든 가치기준을 인간에게만 두기 때문에 인간 외의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신의 권위도 영적세계도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유물적인 현실세계만을 문제 삼게 된다.
맺음 말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하나님도 되신다. 이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이며 점진적이라야 한다. 손봉호 교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는 선지자적 비관주의에 입각해서 이뤄져야 한다. 이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간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아무튼 우리가 유념할 것은 크리스천은 단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몸부림치는 개혁자나 사회봉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불행하게도 창의적 접근지역 등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어둡고 폐쇄된 곳이 너무나 많다. 흑암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문제의식 없이 마치 소가 닭 보듯이 세상을 무감각하게 사는 것은 문제가 크다. 우리는 개인구원을 통해 사회변혁을 시도하지만 동시에 불의한 사회를 위해서 파수꾼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jrsong007@hanmail.net
11.0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