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산상수훈의 첫 문장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결코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비움의 철학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유일한 푯대요 나아갈 방향이다. 우리는 이 예수를 배우고 따르기 위해 매일 기도하며 말씀을 본다. 나아가 주기적으로 회중예배와 소그룹 모임 등에 참여한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왜 주님을 닮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케노시스 영성이 없기 때문이다. 더러운 물이 담긴 컵에는 아무리 생수를 부어도 소용이 없다. 혼탁하며 흘러넘칠 뿐이다. 모든 현상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본질에서 이탈하면 그릇된 결과를 유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큰 과업보다는 우리 자신들을 보고 계신다. 케노시스 영성, 이것이야말로 목회와 선교의 시발점이다.
1. 케노시스(Kenosis) 의미
케노시스 사상은 성육신(成肉身) 이론의 핵심이다. 케노시스(Kenosis)란 “비움, 소모”를 의미하는 헬라어이다. 비움이란 헬라어 “케노우(κενοω)”에서 나왔다. 그 뜻은 “비우다, 힘을 박탈하다”라는 것이다. 케노시스(kenosis)란 주로 예수님의 “신성포기, 자기 비움”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케노시스의 원형은 하나님이 모든 특권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빌2:7)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비움의 극치를 이루셨다.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no reputation, himself nothing)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7-8)고 언급했다. 이렇게 케노시스적 화신(化身)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마침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10:45)로 내어주셨다. 예수님의 비움은 위장된 겸손이 아니라 실제였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비하(卑下)는 승귀(昇貴)를 가져왔다(빌2:9-1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메시아이신 주님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자기 비움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2. 비움에 대한 일반원리
공간(空間)이라는 단어의 한자만 보아도 “비움”이 들어있다. 리얼리티(Reality)한 표현을 시도하는 미니멀리즘 디자인(Minimalism Design)을 토대로 한 인테리어(Interior)는 더 작게 더 간결하게를 모토로 한다. 즉, 비움으로써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동양의 미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단순함과 간결함 그리고 공간을 최대한 확보함으로서 현대인에게 쾌적함을 제공한다. 속이 빈 대나무피리와 바이올린은 공명(共鳴)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릇도 쓰임 받기 위해서는 깨끗함과 동시에 빈 그릇이어야 한다. 선지생도의 아내가 빌린 빈 그릇, 베드로의 빈 배, 가나 혼인잔치의 빈 항아리의 공통점은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빈 그릇은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다. 그러나 뭔가 가득찬 그릇은 새 것을 담을 수 없다.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가 더 아름답다. 빽빽한 대도시를 벗어나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빈 공간으로 주행할 때를 상상해보라.
케노시스(Kenosis)란 헬라어로서 “비움”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은 케노시스 그 자체였다.
우리 심령이 비워있지 않는 한 성령의 능력은 나타날 수 없다 .
3. 비움이 없는 사람들
현대병은 한마디로 가득 채움에서 시작된다. 과욕, 과식, 과로가 대표적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들은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 채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한다. 활화산 같은 욕망의 끝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곳에는 쾌락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평안과 기쁨은 없다.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달려가지만 정작 신기루가 되고 만다. 모든 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회와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저녁노을을 쳐다볼 여유도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한적함, 단순함, 소박함, 겸손함, 천진함, 동심, 비움, 버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기에는 뭔가 어색함이 있다. 인간이 번잡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소유와 존재의 삶을 혼동하게 된다. 결국 덜 중요한 것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채움을 향한 목적지향적인 인생살이는 피곤하고 허망하다. 중국의 철인 장자(莊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을 주장했다. 텅 빈 방에 햇빛이 밝게 비치듯 마음을 비우면 밝음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뜻이다.
4. 간디 눈에 비친 기독교
“저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과 예수님은 너무나 딴판이기 때문이다(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을 의식적인 예배와 행사만으로 즐긴다.” 이상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간디가 한 말이다. 그의 따끔한 충고가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탐욕으로 가득 찬 번영신학의 세속논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요, 낮아짐이 아니라 높아짐이요, 희생이 아니라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좇는 사람들 대다수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이 가신 길을 역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동네북처럼 얻어맞으며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는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5. 케노시스적 선교
케노시스적 선교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비움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은 자기를 비움에서 시작되었다. 자기 심령을 비우지 않고 세상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부요와 채우심을 경험할 수 없다. 선교는 자기 비움, 자기 낮아짐, 자기 소모이어야 한다. 선교사는 알게 모르게 자기 왕국(Kingdom)을 건립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그래야 세상의 찬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킹덤이 아닌 자기 킹덤은 심판받을 일이다. 따라서 선교는 어떤 경우이든 자기 깃발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무대 위에 현지인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자기는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너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는 태도가 답이다. 그런 점에서 1세대의 선교는 당대 금자탑 쌓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가 선교를 할 수 있도록 등받이가 되어주어야 한다. 이렇듯 케노시스 영성이 없는 선교는 타락하게 되어있다.
맺음 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니체(Nietzsche)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초인 사상(Übermensch)을 언급했다. 그것은 “낙타 같은 섬김이요, 사자 같은 용맹함이요, 어린이 같은 단순함”이다. 우리에게 이웃을 향한 낙타 같은 섬김이 있는가? 악과 불의를 향한 사자 같은 용맹함이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어린이 같은 믿음이 있는가? 그는 당대의 지성인으로서 우리의 아픈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의 언급은 간디와도 맥을 같이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굳이 외식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우리 자신의 행복 그리고 무한한 열매를 맺기 위해 심령을 가난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덕지덕지 붙은 적폐를 도려내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케노시스 영성이란 빼기 인생이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욕망을 비우고 또 비우면 영혼이 맑아지게 된다. 그 때에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고 얼굴은 주님의 영광스런 광체를 드러낼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08.2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