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역사의 한 페이지를 자리매김 한 모라비안 공동체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18세기 유럽 교회는 기울어 가고 있었다. 과거 찬란한 기독교 문명 속에 교회 건물들은 관광지가 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이때에 모라비안 공동체는 어둠 속에 찬란한 빛처럼 세계 복음화를 위한 진원지가 되었다. 영국교회의 대주교 겸 작가였던 로날드 녹스(Ronald Knox, 1888-1957)는 모라비안 운동을 일컬어 유럽 선교에 활력을 불어넣은 “누룩”이라고 했다.  저들은 처음 독일 작센지역에 있던 조그만 공동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공동체가 보여준 선교의 모범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어떻게 저들이 20년 동안 파송했던 선교사 숫자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지난 2백년간 모든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 보다 더 많을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저들은  요한 웨슬레(John Wesley)를 비롯하여 세계의 많은 전도자들에게 선교적 영감을 끼쳤다.  코로나로 선교가 어려운 이 시대에 우리는 저들의 선교정신과 사역방법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모라비안 운동의  유래

 

모라비안 공동체는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역에서 나온 난민들이 독일 작센 지방의 사유지에 정착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말한다. 모라비아란 이름은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동쪽에 있던 지명이며 그 어원은 그 지역 북서부에 있는 모라바(Morava) 강에서 유래했다. 모라비안들은 15세기 초에 종교 개혁자 존 후스(John Huss)의 영향을 받았다. 저들은 1467년 이름을 “형제 교회(the Church of the Brotherhood)”라고 개칭하였으며  16,7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제도를 거부함으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저들은 1722년에 90명의 신도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탄압을 피해 작센지방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젊은 경건주의자인 진젠도르프 백작으로부터 드레스텐(Dresden) 근처의 영지(領地) 한 부분을 제공받게 되었다. 4년 후인 1726년에는 그 수가 3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저들은 이곳을 헤른훗(Herrnhut)이라 하였다. 처음에 진젠도르프는 피난처만 제공했을 뿐, 이 정착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점차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후에는 모라비안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백작의 지위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1727년 성찬 예배를 통해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 감독으로 안수를 받음으로서 헤른훗의 지도자로 확증되었다.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Zinzendorf, 1700-1760) 백작

“나에게 한 가지 열정이 있다면, 그 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I have only one passion, and that is Christ).”  이 말은 진젠돌프 백작의 중심 생각이었다.  그는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선교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과 열심 면에서도 진정한 모델이 되었다. 그의 지도력 하에서 모라비안 운동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유명한 경건주의자인 프랑케의 제자였으며 열렬한 경건주의 가문에서 자란 젊은 귀족이었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에 그의 전 생애와 재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했었다. 그는 당시 독일의 학문성향인 이성적 신(神) 인식을 거부하였고 오직 기독론 중심의  역사적 계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교 신학은 “복음은 모든 피조물,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져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유일한 선교사다. 인간은 성령의 대리인이요, 성령이 이미 예비하신 자들에게만 선교사로 갈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선교의 주인이고 그 자체를 주관하시므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앞설 수 없고, 교회가 선교를 주장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18세기 경건주의를 빛냈으며, 크리스천 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새로운 판단력을 많은 사람에게 제공해 주었다.

 

3. 모라비안 공동체의 선교내용

 

모라비안 선교회가 1732년 8월 서인도 제도에 최초로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 사람은 목수이고 한 사람은 옹기장이였다. 이제 들어가면 다시 오지 못할 두 사람을 보내면서 성도들은 부둣가에 나와서 그들을 배웅했다. 그 때 배가 막 떠나는 순간 한 사람이 배웅 나온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 "우리의 죄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고통이 우리가 드리는 생명과 희생을 통해서 보상을 받아 주소서." 1732년에 이렇게 시작된 저들의 선교는  1735년에는 그린란드와 수리남, 1737년에는 아프리카, 1740년에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실론, 1742년에는 중국, 1747년에는 페르시아, 1754년에는 자메이카,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28년 동안 모라비안 교회는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했다. 진젠도르프 사후에도 모라비안 공동체는 서인도제도에서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해외 선교지의 신자 수가 내지 교회 신자의 3배나 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모라비안들은 사실 당시 개신교 교회의 주축 세력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퉁이 돌 같은 저들을 들어 선교의 주춧돌로 쓰셨다.

모라비안들은 개신교 역사에서 최초로 선교중심적인 삶을 산 공동체였다.

 

5. 모라비안 선교 운동의 특징  

 

모라비안들이 짧은 기간에 전 세계에 걸쳐서 선교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기도운동을 했다. 저들은 1727년부터 24명으로 구성된 기도 모임을 만들어서 남여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자정부터 한 팀이 한 시간씩 24 시간 연도(連禱)를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도가 그로부터 백년 이상 지속됐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육신적 선교를 했다. 한 예로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노예로 팔려갈 것을 결정하고 그들 속에 들어가 살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이처럼 저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을 몸소 실천했다. 셋째는 철저한 훈련과 준비였다. 저들은 공동체 생활 통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어디든 가기 위해 영적훈련을 받았다. 또한 생존을 위한 실제적인 생활 준비를 하였다. 넷째는 평신도 중심의 자비량 선교를 했다. 저들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여 누구에게도 지원을 받지 않았다. 모라비안중에는 기술공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자립하기 위해서였다. 다섯째는 전투적인 선교였다. 모라비안들은 본국에 있는 신자와 선교사의 비율이 12:1일 정도로 대단하였다. 저들은 선교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다.

 

맺음 말

 

진젠도르프가 이끌었던 모라비안 공동체는 세계선교역사에서 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저들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적인 삶과 희생적 선교는 비교할 데가 없다. 저들은 사역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섬김의 가족공동체를 지향했다. 이유인즉, “곁에 있는 사람들끼리  사랑을 표출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사랑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 때문이었다.  나아가 저들은 세상을 향해서 빛처럼 살아가는 전투적인 삶을 추구했다. 모라비안들은 선교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은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선교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라비안 공동체는 당시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가장 강력한 선교 기관이 될 수 있었다. 주님의 지상 명령을 받들어 집단으로 헌신한 이 공동체는 역사가 흐른 지금까지도 진한 감동과 도전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모라비안들의 선교 정신과 삶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교회들도 모라비안 같은 선교정신과 열정으로 도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300년이 지난 지금도 저들의 숭고한 헌신이 보일 듯 말듯 하다. 

 

 

jrsong007@hanmail.net

 

07.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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