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동원가로 헌신했던 존 모트(John R. Mott )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우리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시키자!” 이는 1888년 결성된 학생선교 지원자 운동(SVM: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표어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세계선교를 향한 황금시대였다. 그 중심에 SVM이 있었다. 본 단체를 통하여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SVM 선언에 서명한 후 5대양 6대륙으로 떠났다. 그 숫자가 무려 20,500명이나 되었다.  문명이 열악한 시대에 어떻게 이 많은 청년들이 헌신할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시 SVM은 선교사 파송의 못자리였다. 주목할 것은 그 단체를 이끈 지도자이다. 존 모트는 직접 선교사로 파송을 받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동원가로서 SVM과 YMCA을 통하여 지대한 선교적 공헌을 하였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2만 명 이상의 청년들이 선교사로 동원되었을까? 

21세기 세계선교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쳐 있다. 가장 큰 문제는 COVID19로 인한 선교 환경변화가 아니다. 바로 사람의 문제이다. 선교를 위해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자기 생명을 담보한 헌신자들이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존 모트가 살아 있다면 가슴을 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역사 속에서 그를 불러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선교적 꿈과 열정과 역동성을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

 

1.  존 모트의 헌신 배경

   

존 롤리 모트(John Raleigh Mott, 1865년 5월 25일-1955년 1월 31일)는 미국 뉴욕에서 4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성장한 곳은 아이오와(Iowa) 주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 9월에 가족이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 목재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감리교회에 성실히 출석했다. 그는 커가면서 매일 신약성경을 한 장씩 읽었다. 스스로 영적성장을 위해 노력을 한 것이다. 

모트는 사리 판단이 정확하고 지적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또한 여려 차례 웅변대회에 출전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16살이 되던 해 아이오와(Upper Iowa University)대학에 입학해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모트는 아이오와 대학을 졸업한 후 전문 직업인이 되기 위해 코넬(Cornell)대학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가 1885년 가을이었다. 그는 코넬대학에서 상상할 수 없는 영적인 축복의 길로 인도되었다.  

 

2. 존 모트의 선교 헌신

 

1886년 1월 14일이다.  모트는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차 어느 선교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강사는 영국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스터드(C.T. Studd)였다. “당신을 위해 위대한 것을 찾겠는가? 그것을 구하지 말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마6:33). 모트는 이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다. 그는 집회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무엇인가가 내 영혼을 파고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나는 전에 없던 태도로 구원 얻기를 간구하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할 마음이 있음을 느꼈다. 나의 마음은 많은 감동적인 사상과 영적 투쟁으로 계속 가득 찼다.” 

1886년 여름 존 모트는 복음전도자인 D. L. 무디의 지원으로 매사추세츠 주 헐몬산(Mount Hermon)에서 열린 첫 번째 기독학생 수련회에 참석했다. 집회는 한 달간 열렸고 미국과 케나다의 89개 대학에서 온 251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모트는 코넬대학교의 대표로 참석한 것이었다. 집회 마지막 날 로버트 윌더가 선교사로 헌신하자는 제안을 했다. 모트를 비롯한 100명의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I purpose, God willing,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프린스턴 서약`(Prineton Pledge)에 서명했다. 이 서약은 후에 학생자원자 운동의 기초가 됐다.

 

존 모트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원가로서 선교일꾼을 일으키는데 탁월한 족적을 남겼다.

선교란 소명 받은 곳에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나가는 것이다. 

 

 

3. 존 모트의 사역

 

존 모트는 대학시절부터 조직력과 리더십이 탁월했다. 그는 2년 간 코넬대학에서 ‘기독교청년회’(YMCA) 학생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면서 회원 수를 3배나 증가 시켰다. 그는 세계복음화를 실현하기위해 교파간의 협력을 중요하게 보았다. 학생자원자운동은 다양한 교파와 신앙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이 일이 이상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88년에 학생자원선교운동(SVM)의 의장이 되어 대학생 선교동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890년부터 1939년까지 약 2만500명의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헌신케 하였다. 

또한 모트는 YMCA에서 국제위원회 학생부와 해외책임자로서(1888-1915) 활동했고 그 후 세계연맹의 회장(1926-1937)이 되어 전 세계를 누비며 젊은이들에게 선교의 불을 지폈다. 1910년에는 범세계적인 에딘버러 선교대회(Edinburgh Conference)를 주최하여 위원회의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본 대회 때 그는 세계교회의 회원들에게 공식 메시지에서 선포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복음화를 향한 그의 강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복음화를 우리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큰 신뢰와 전능하신 힘에 대한 응답으로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부탁은 우리 선교사들이나 선교단체나 또는 이 대회의 우리 회원들에게만 위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 기독교인 가정, 나아가서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의무로 지워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기초적인 덕목들입니다.”

 

4. 존 모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인간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누구나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떠한가? 그는 세계선교의 비전 가운데 주의 일꾼들을 일으킨 복음전도자이며 탁월한 선교동원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존 모트는 평신도 선교지도자로서 평생을 쉬지 않고 세계선교를 위해 힘썼다. 그는 주님을 위해 세상 부귀영화의 길을 포기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세우셨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 교회지도자들, 정부 관료들이 그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그는 1946년에 국제선교운동에 쌓은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존 모트는 1955년 1월 31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생전에 죽음에 대해 “나에게 죽음이란 차를 바꿔 타는 정거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록 선교현장에서 사역을 하지 않은 평신도였지만 복음전도자와 선교동원가로서 큰 족적(足跡)을 남겼다. 혹자는 그는 가리켜 영적 거인이요, 현대판 사도 바울이라 칭하기도 한다.  

 

맺음 말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존 모트는 SVM의 이 슬로건에 스스로 매인바 되어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았다. 그는 특별히 척박한 학원 선교에 집중했다. 당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할 것 같은 그 비전과 열정은 불행히도 그와 함께 묻히고 말았다. SVM의 믿음대로라면 마땅히 실현되었어야 할 세계 복음화가 더 요원하게 느껴짐은 무슨 문제인가? 제 3세계의 급상승하는 인구 증가율과 도전하는 악의 세력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킹덤을 생각하며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선교에 헌신한 일꾼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자원자운동으로부터 1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는가? 우리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 이루겠다는 열망과 도전이 있는가? 존 모트(John R. Mott)가 못다 한 이 선교비전이 우리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래서 응축되어있는 교회 안의 힘을 열방으로 표출해야 한다. 마치 들풀처럼.

 

jrsong007@hanmail.net

07.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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