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호숫가에서 조약돌 하나를 던지면 파문이 일어난다. 그 파문은 호수 전체로 퍼진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만찬가지이다. 한 두 사람의 영적인 각성은 그 사회를 진동하게 한다.
18세기 초 영국에서는 반동적인 합리주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러한 불신앙의 도전 앞에 교회는 비참하리만큼 무기력하였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외면하고 설교자들은 복음의 절대성을 잃었다. 세속철학의 범람, 구교와 신교의 갈등, 사업혁명의 격류, 도덕적 퇴락 등으로 영국사회는 정신적 파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시시때때마다 당신의 종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의 복음 운동가들을 예비하셨다. 새로운 영적 각성은 그들 대학을 넘어서 영국 전역으로 퍼졌고 결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은 COVID19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심령이 메말라 있다. 난세(亂世)이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하고, 영웅은 역사를 창조한다. 어두웠던 시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불꽃처럼 쓰임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며 오늘 날에도 그러한 인물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그 사람은 특별한 자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히 반응한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
1. 웨슬레(Wesley) 형제와 홀리 클럽
요한 웨슬리(AD 1703-1791)는 성공회 목사인 사무엘의 19명 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3-88년)는 18번째로 태어났다. 그들의 어머니 수잔나(Susanna)는 자녀들에게 심원한 교육적 영향을 끼친 경건한 어머니였다. 동생 찰스는 형이 이미 졸업한 옥스퍼드(Oxford)대학에서 ‘홀리클럽’(Holy Club)을 만들었다. 목적은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소원에서 고전과 신약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형인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에 있는 링컨대학에 특별연구원 강사가 되어 이 모임에 합세했다. 이 홀리클럽 모임에서는 예배와 성경공부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 주린 자, 갇힌 자를 돌아보았다. 훗날 이 모임에 유명한 칼빈주의자(Calvinist)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년)도 함께 활동하였다. 모임은 크지 않았으며 25명 정도였다. 그러나 규율을 엄격히 지켰으므로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요한은 찰스와 함께 1735년 10월 식민지인 미국 조지아를 향해 선교여행을 떠났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이때 배 안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는데 신앙의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요한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가 1738년 5월 24일에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던 중 중생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중생체험을 갖게 된 계기가 모라비아인에게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우고자 독일로 건너가서 진젠돌프 백작을 만났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에게 배운 바가 크지만 그들보다 더 행동적이요 덜 신비주의적이며 폭 넓은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중생과 견학으로 심적인 확신과 사역적 정리가 된 그는 이제 정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년에 약 8000㎞를 말을 타고 여행을 하였으며 일주일에 다섯 번 설교하였다. 그가 죽을 때 메소디스트 교회 설교자 수는 541명, 회원 수는 134,540명이었다. 이렇게 훗날 감리교(Methodism)가 된 요한 웨슬레 부흥운동은 타락한 영국사회를 갱신시키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두 번째 큰 교단인 감리교단을 탄생시킨 것이다.
2.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과 기도회
찰스 시므온(AD 1759-1836년)은 1779년 케임브리지(Cambridge)대학 학생시절에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였다. 그는 1782년 졸업과 함께 왕립대학 특별연구원과 동 대학의 성삼위교회(Holy Trinity Church)의 교목으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사역은 54년간 계속되었다. 그는 공적인 활동 외에 학생들을 자기 집에 비공식적으로 초대하여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시므온의 집에서 그리스도와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모임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이해했고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꿈도 가졌다. 시므온에게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영국과 세계도처에서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되었다.
1811년에는 시므온의 영향으로 케임브리지대학에 외인성서회가 조직되었다. 그 모임의 목적은 전 세계에 걸쳐 각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시므온이 케임브리지에서 남긴 최대의 업적은 1836년 죽은 다음에도 그가 힘쓰던 사역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1848년에는 프라이빗(Private) 기도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1858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회 선교단이 설립되었다. 그 취지는 기도와 자료검토를 위한 집회를 자주 가지므로 보다 광범위한 선교사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역에 지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영국 대학생복음운동이 체계화된 시점은 1877년에 결성된 케임브리지 기독학생단(Th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에서 찾는다. 이 모임은 처음에 소수로 시작하였으나 마침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는 기독학생 단을 포함하여 각 나라마다 다양한 대학복음단체 학생들의 우애 있는 일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난세(亂世)는 영웅을 필요로 하고 영웅은 역사를 창조한다.
이 시대는 영적인 파문을 일으킬 인물들을 필요로 하고 있디.
영웅이란 특별한 자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헌신한 자이다.
3. 케임브리지 세븐
(Cambridge Seven)
영국 대학선교 역사에서 케임브리지 7인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케임브리지 7인은 친구, 운동서클 관계 등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운동은 미약하였고 자주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1882년 미국의 복음전도자 D. L. Moody가 캐임브리지에서 일주일간의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이 집회를 통하여 큰 영향을 받았으며 후에 다양한 방법으로 회심했다. 그리고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케임브리지 7인은 영국 상류층 출신의 대학인이요, 인기 스포츠의 유명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명예, 부, 사회적 지위, 권세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들은 젊은 날부터 일생을 선교의 산제사로 드렸다. 그들의 선한 영향력은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중국 그리고 미국의 헐몬산학생선교사지원자모임(SVM, Student Volunteer Missionary)을 형성하는 데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IFES의 설립자인 Robert Wilder와 R. S. Forman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 세대에도 큰 도전을 주고 있다.
맺는 말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천적 힘은 무엇이었나? 산업혁명, 막강한 군사력,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력 등도 한 몫 했다. 그러나 핵심은 영적인 깨우침이었다. 당시의 웨슬레 형제를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대학의 홀리클럽, 교목인 시므온을 통한 케임브리지대학의 선교운동, 조지 휫필드의 부흥운동 그리고 케임브리지 7인의 중국 선교사헌신 등은 영국사회를 일깨웠으며 정화했다. 이러한 영적각성운동들은 여러 조직을 만들게 되었으며 선교회들은 세계선교를 향한 통로로 쓰임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18세기 영국 못지않게 사상적으로 혼돈스럽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마음 둘 곳 없는 이 시대에 교회가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크리스천들이 일어나야 한다. 절대적 복음 하나로 승부하며 세상에 영적 파문을 일으킬 주의 종들은 어디 있는가?
jrsong007@hanmail.net
05.2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