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내일의 세계를 정복하려면 오늘의 대학을 정복하라”라는 말이 있다. 대학에는 장차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나갈 차세대 지도자들이 집단으로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석학인 말릭(C.H. Malik)은 언급하기를 “대학은 서구문명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산물 중의 하나”라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청년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 오늘의 대학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선교”라는 통상적 구호들은 결코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확실히 대학캠퍼스는 사회 모든 곳을 적시는 일종의 물 근원과 같다. 여기서 흐르는 물이 청류인지 탁류인지에 따라 한 공동체의 미래 운명이 결정된다. 이에 우리 기독교회는 이 지성인 그룹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나타나도록 탄원하며 선교적 부담을 가져야 한다. 이 사역은 역문화적으로 올라가며 교회의 연합적 대오를 필요로 한다.
1. 대학의 기원
대학은 중국 주나라 국학이나 플라톤 아카데미아(BC 387년)를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중세 수도원이나 성당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신학과 철학 교육을 기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먼저 중세대학의 성립배경은 크게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는 학문적 측면이다. 중세시대에는 오래 전부터 수도원과 대성당 소속의 본산학교에서 비교적 수준이 높은 학문적 연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또한 의학적 측면이다. 당시 사회가 페스트와 같은 유행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더욱이 십자군전쟁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했기 때문에 의술과 의학적 지식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나아가 경제적 측면이다. 12세기 당시는 상업과 무역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보다 전문적인 법률적 지식이 요구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측면이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은 황제나 국왕 또는 교황의 인가를 받아 설립되는 것이 관례였다. 연구단체와 국왕 등의 지배세력의 이해타산이 서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2. 최초의 대학
중세 최초의 대학은 11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의 블로냐(Bologna)대학이다. 이 대학은 최초의 서구 대학이자 남부 유럽 대학의 모델이 되며 법학의 중심지였다. 이 외에도 일반 교양과목과 의학, 철학, 신학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탄생 연대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볼로냐(Bologna):1180년, 파리(Paris):1200년경, 옥스포드(Oxford):1200년경, 살레모(Salerno):1200년경, 몬트퍼리얼(Montpelier):1180년경, 비엔나(Viena):1365년, 에르푸르트(Erfurt):1379년, 하이델베르그(Heidelberg):1385년 등이었다.
15세기 말에 유럽에 80여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모법적인 대학은 볼로냐와 파리대학이었다. 대학 문화의 시각으로 보면 중세는 긴 어둠의 터널이었다. 지성인들은 가톨릭교회에 눌린바 되어 그 잠재력을 창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은 문예부흥과 금속활자 개발로 인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대학인을 깨우는 방편으로 문예부흥이 소프트웨어라면 금속활자는 일종의 하드웨어인 셈이 되었다.
대학은 사회 모든 곳을 적시는 일종의 물 근원과 같다.
여기 물이 청류인지 탁류인지에 따라 한 국가의 미래가 결정된다.
대학선교는 역문화적으로 올라가며 연합적 대오를 형성할 때 열매가 크다.
3. 한국과 미국의 대학 실태
현재 한국에는 약 400개 대학 300만 명의 대학 인구가 있다. 해년마다 대한민국 육, 해, 공군 전체 60만 명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대학에 들어오고 또 졸업하여 나간다. 그들은 마치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쉴 세 없이 2 내지 4년 텀으로 뒤바뀐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학은 어떠한가? 미국 대학은 크게 공립(주립)과 사립으로 나뉘며 그 안에서 4년제와 2년제로 구분된다. S&T Analysis Reports에 의하면 2009-2010년도 기준으로 미국의 모든 대학 수는 4,495개이다. 이중 공립대가 1,672개(전체의 37.2%), 사립대가 2,823개(전체의 62.8%)로 사립대의 수가 더 많다.
이렇게 미국에는 한국의 15배가 넘는 약 4500개 대학이 있다. 특히 미 대학가에는 5대양 6대륙에서 차출되어 와 있는 약 110만 명의 영재들이 있다. 저들 유학생들 중 다수는 일당 백, 천 이상을 할 장래가 촉망된 자들이다. 교회에서 선교차 그 나라에 간다 해도 저들은 쉽게 만날 수 없으며 더구나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는 말 붙이기도 어렵다. 헌데 저들이 제 발로 우리 곁에 와 군(群)을 이루고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4. 유학생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
첫째는 감상적 선교시각이다. 선교란 어려운 오지로 가 구제와 사회 봉사적인 활동이 깃들어야 된다는 의식이다. 이에 하다못해 멕시코 국경이라도 넘어갔다 와야 선교했다는 느낌과 감동이 있다.
둘째는 교회부흥과 관련이 있다. 교회는 성장을 지향한다. 헌데 유학생 사역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은 도움을 받고 정들만 하면 학위 받고 자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므로 “모이는 교회 입장”에서 보면 유학생 사역은 재미가 없다.
셋째 전문성과 관계된다. 대개 교회는 대중적인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대학사역은 단일 계층이다. 전문성을 요구한다. 나이, 언어, 거리, 시간, 문화, 의식구조 등 다방면에 거리감이 있다.
넷째로 이기심이다. 대부분 교회가 선교에 참여할 때 관계 지향적이다. 아무리 사역적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교회에 직접적으로 유익이 되거나 관계성이 없으면 동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5. 전략적인 접근
동물의 왕국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수많은 짐승을 다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물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사자나 호랑이만을 집중적으로 양육하면 된다. 그들이 우리 대신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를 순회하기란 쉽지 않다. 대신 대학에 와 있는 차세대 리더들을 선교하는 것은 세계선교의 첩경이 된다. 이런 사역을 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CCC, ESF, IVF, ISI, AFC, UBF, YM, Navigators 등등의 초교파적 선교기관과 그리고 캠퍼스 선교를 지향하는 소수의 대형교회들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턱 없이 힘이 모자란다. 일반적으로 학생 선교단체는 비전과 열정은 있되 힘이 약하다. 이에 비해 지역교회들은 도처에 있고 많은 인력과 공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학선교는 소명과 준비가 된 사람과 단체 그리고 지역교회가 함께 힘을 모을 때 그 파괴력은 배가 될 수 있다.
맺는 말
모든 영혼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존귀하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볼 때 일반 병사와 공수부대 요원과 사관생도 그리고 폭격기 조종사는 전투능력이 같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학선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2천년전 로마 셋집에서 복음으로 외로이 승부했던 바울이 오늘 살아있다면 그는 과연 어디에 사역적 방점이 찍혀 있을까?
그는 최초이자 최고의 선교사였다. 그의 핵심사역은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베소와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서 제자양육을 하였다. 만일 그가 이렇게 전략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아프리카의 한 원주민에게로 갔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말은 대학선교가 으뜸이고 다른 사역은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우리 곁의 더 중요한 사역을 방치한 채 비행기 타고 먼 나라로 가는 선교만이 능사가 아님을 강조함이다. 오늘의 대학촌은 영적으로 너무나 썰렁하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jrsong007@hanmail.net
04.1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