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2020 경자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금년은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끝나는 셈이다. 21세기 인류가 역병에 휘둘릴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까? 상전벽해(桑田碧)처럼 달라진 세상에서 선교는 직격탄을 맞았다. 많은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했는가 하면 남아 있는 사람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급격한 선교환경의 변화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은 평안할 때보다도 격동적일 때가 많았다.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칼의 위험이 끊임없이 엄습했다. 그러할 때마다 인간은 힘들어 했고 교회는 움츠려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선교의 영이다. 이는 결코 세상의 도전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심이 흉용할 때 선교가 들불처럼 번졌던 간증도 있다. 초대교회와 중국의 가정교회가 대표적이다. 이들 교회는 인위적인 Sodality보다 자연적인 Modality적 흐름을 탔다. 그 결과 인동초처럼 온갖 시련을 이겼으며 놀라게 부흥했다. 따라서 코로나로 위협받은 이 때 우리도 저들 교회를 교훈삼아 선교 패러다임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1. 초대교회의 강인함
사도-속사도-교부들 중심으로 내려온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다. 저들 초대교인들은 콜로세움에서 맹수의 밥이 되었으며 길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나 메시아 되신 구세주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만일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라면 생명을 담보해야만 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물고기 형상으로 서로를 알아보았으며 카타콤이라는 무덤 속에서 예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거대한 제국 앞에 교회는 겨자씨처럼 보이지도 아니 했다. 아니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였다.
헌데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세상 권세에 힘없이 밟히고 찢기던 교회가 죽기는커녕 야생초 같은 생명력과 함께 로마를 영적으로 정복해 나갔다. 마침내 AD313년에는 세상의 왕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2. 중국 가정교회의 부흥
1949년 10월 1일, 대륙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유물론적 견지에서 종교를 아편과 같이 취급했다. 그 시조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이다. 그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환상적 행복인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인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중국에 발을 딛는 최초 개신교 선교사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이다. 그는 1807년부터 25년간 사역했다. 그 이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헌신했다. 많은 이가 순교했으며 피와 땀과 눈물로 교회를 개척했다. 그 결과 80-90만 명의 신자들이 생겨났다.
자식을 두고 떠난 어미처럼 추방당한 선교사들은 걱정했다. “이제 복음의 씨가 말라 없어지겠구나. 누가 저들을 목양한단 말인가?” 그런데 반세기 후인 1989년 통계를 보니 8천만-9천만 명으로 신도들이 늘어났다. 100배로 증가한 것이다. 아니 선교사, 목회자, 신학교, 예배당, 교육 프로그램도 없던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더구나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가정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받지 않았는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3. 유대인의 말씀전수
익히 아는 바 이스라엘 족속은 나라 없이 2천년 동안 이방 땅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저들은 이민족으로부터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다. 중세의 흑사병과 십자군전쟁 시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근대의 포그롬(Pogroms, 대박해)과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을 악의 원흉으로 이데올로기화하여 증오가 폭력으로 분출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저들은 도처에서 반유대주의 경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보통 한 족속이 이방에서 유랑하며 100년 정도만 핍박을 받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동화되기 마련이다. 한 예로 우리 한국은 36년 동안 일본에 압제를 받았다. 우리는 주권을 빼앗겼지만 땅과 백성이 있었다. 그러함에도 언어와 창씨개명 등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았다. 이에 비하면 유대인의 생존 본능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저들은 어떻게 터전도 없이 오랜 세월을 더부살이하면서도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니 체 살아남았을까? 특별히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4천년간이나 말씀을 자자손손 전수할 수 있었을까? 우리 기독교는 교육신학과 선교적 측면에서 저들의 노하우를 배울 필요가 있다.
4. 외적 환경을 이긴 믿음의 공동체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 속에 보화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캐지 않으면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미 살펴본바 초대교회에서는 겨자씨만도 못한 교회가 300년 만에 압제의 화신인 로마제국의 주류세력으로 확산되었다. 중국의 가정교회에서는 반세기만에 100배로 증가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외세의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4천년간이나 자자손손 말씀이 대물림하였다. 이러한 사례의 승리비결은 무엇인가?
첫째, 혈연과 지연 중심의 모임을 지향했다. 생활공동체와 예배공동체가 하나로 묶어진 것이다. 낯선 이웃은 아무리 친해도 이웃일 뿐이다.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는 한계선이 있다는 말이다. 둘째, 계급 없이 구성원 모두가 주체였다. 함께 결정하고 책임을 공유했다. 그곳에는 피동성이 없었다. 셋째, 신앙과 생활이 일원화되었다. 사도행전2장 말씀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삶을 공유했다. 넷째, 본질에 집중했다. 모아진 힘을 건물에 투자하지 않았다. 오직 말씀과 기도 중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형제애를 발휘하는데 사용했다. 다섯째, 누룩처럼 번식했다. 안전상 소수로 모임을 가졌으며 숫자가 많아지면 스스로 분가했다.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의 도전을 뛰어 넘어 왔다.
교회는 선교의 영이 운행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선교는 Sodality 보다 Modality적 흐름을 탈 때 생명력이 더하다.
5. 생각해보아야 할 주된 쟁점(Issue)
“소크라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들어” 가수 나훈아가 금년 추석특집 가운데 불러 히트 쳤던 곡의 가사다. 일반 생활도 이럴진대 목회와 선교는 어떠할까? 그러나 우리 시대가 코로나로 묶이고 활동이 제한받는다 할지라도 2천년전 초대교회시대나 문화대혁명 때의 중국의 가정교회 상황과 비교할 수 없다. 저들은 도대체 어떻게 처절한 환경을 극복해냈는가? 그 주된 원인은 인위적인 Sodality보다 혈연과 지연중심의 Modality적 공동체를 예배공동체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 우리 사역 현장과 대비된다. 생활은 가족중심으로, 신앙은 이웃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또한 교회 안에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모두가 사역의 주체가 되도 힘이 모자랄 판에 절대 다수인 성도들은 그저 부분적으로 협력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격이다. 주의 나라 확장은 대표선수 격인 사역자 몇 명으로 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본질적인 사역보다 건축이나 여러 행사 등 비 본질적인 일에 너무 에서지를 소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몸에 밴 선교적 패러다임이 깨지지 않는 한 결코 초대교회와 같은 힘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맺음 말
생명이란 무섭다. 동토를 뚫고 나오는 봄의 새싹을 보라. 복음역사는 굴절은 있을지언정 결코 단절은 없다. 우리는 그 증거를 역사 속에서 살펴보았다. COVID19 영향으로 모든 것이 난관에 부딪쳐 있는 지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심각히 고려해봐야 한다. 추후 이보다 더한 환란과 박해가 오지 말란 법이 없다. 하나님의 선교는 시대환경을 불문하고 도도히 흘러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 속에서 이미 검증된 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인위적인 Sodality보다 자연적인 Modality적 영성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물량주의를 배격하고 본질에 충실하며 모든 구성원들을 은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도록 동원하는 일이다. 여호와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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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