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패러다임의 혁신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4차 산업혁명과 맞물린 포스트코로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세상은 과연 어떻게 뒤바뀔 것인가? 미래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급변하는 세상에 변치 않는 복음을 설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익히 아는 바 지나간 2000년간 기독교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감내하며 타민족 선교를 해왔다. 문제는 세계선교를 위해 크게 쓰임 받았던 초대교회와 서구교회가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도 생물처럼 수명이 있다는 말인가? 만일 아니라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현용수 박사는 “교회가 수평선교만 하고 수직선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설파했다. 이는 정곡을 찌른 혜안이다. 모름지기 거룩한 공교회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서 선교적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적 선교 패러다임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기존의 수평선교를 지속하되 가정을 통한 수직선교가 진행되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한인교회도 언젠가는 서구교회 궤적을 따라 쇠락해 갈 수밖에 없다. 아니 이미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1. 교회사의 아픈 현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안타까운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때 흥왕하던 교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최초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안디옥교회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바울이 설립한 소아시아 교회들이나 마게도니아 교회들도 없어졌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으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 교회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기찼던 동로마 교회는 회교의 중심지로 변했다. 

한때 중유럽 바바리안들과 북유럽 바이킹들까지도 선교를 했던 서로마 교회는 살아있기는 하나 카톨릭 교회로 변질되었다. 칼빈이 태어난 프랑스나 그가 사역했던 스위스, 루터를 배출한 독일,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존 웨슬리의 잉글랜드 등 당대 활화산처럼 개혁의 촛불을 들었던 서유럽 교회들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서구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명목상의 교인들(nominal Christians)로 주류를 이룬다. 

청교도들이 건설한 북미주 교회는 어떠한가? 20세기 중반 까지만 해도 지구 모든 나라들에 선교사를 파송할 만큼 강력했지만 그 이후로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다. 선교역사 135년 밖에 안된 한국교회도 21세기 들어서면서 부터 급격히 힘이 빠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6만여 교회중 앞으로 100년 후에까지 살아남을 교회는 몇 개나 될까?

 

2. 문제의 진단

 

“왜 기독교 교회는 세계선교에 불꽃을 점화했으면서도 정작 자기는 죽어 없어져야 했는가?  유대인은 비록 이방인 선교가 없다 할지라도 저들은 어떻게 4000년간 자손들에게 말씀을 전수하는데 성공했는가?” 일반적으로 교회는 탄생(Birth)-부흥(Growth)-결실(fruition)-쇠퇴(Decline)-소멸(Death)의 단계를 거친다. 이 과정은 보통 200-300년을 주기로 한다. 한 교회가 성장하여 결실기에 들어서면 타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자신은 사라져 간다. 그리고 새로이 복음을 받은 교회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교회가 시대마다 부흥하고 쇠퇴한 데에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이 있다. 

선교학자 Herbert Kane은 북아프리카 교회가 몰락하고 이슬람화한 원인을 정치사회학과 선교학적으로 해석했다. Charles J. Speel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중심하여 형성되었던 강력한 기독교회가 이슬람 세력에 맥없이 무너진 이유를 정치와 종교의 합작품인 반달아리안주의(Vandal Arianism)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흐름은 교회의 흥망성쇠 현상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나 역사 개입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복음의 서진론으로 전개되며 장차 Back to Jerusalem 운동으로 종결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분석은 일리가 있으나 근본적 진단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핵심은 기독교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웃선교에 진력했기 때문이다.

 

수직선교는 부모가 자녀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다.

수평선교는 교회가 타문화권 복음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다.

이상적인 방향은 수직선교와 수평선교가 함께 병열로 나아가는 것이다.

 

3. 미션 패러다임의 상호성

 

현용수 박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두 가지 지상명령을 주셨다. 구약의 지상명령(창18:19; 신6:4-9)은 초림 메시아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함이고 신약의 지상명령(마28:19-20, 행1:8)은 초림하신 예수님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여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전자가 ‘쉐마’에 기초한 가정사역의 사명이라면 후자는 교회공동체가 해야 할 이웃전도와 세계선교의 사명이다”라고 했다. 전자는 부모가 가정이라는 성전에서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여 제자 삼는 일이라면 후자는 목회자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구원받은 이웃들을 말씀으로 제자 삼는 일이다. 구약의 지상명령이 혈통적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가정사역이 본질이라면 신약의 지상명령은 구원받은 교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사역이 본질이다. 전자가 수직전도라면 후자는 수평전도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직선교는 잘했지만 수평선교를 못했고 기독교인들은 수평선교는 잘하지만 수직선교를 못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예수님이 왜 메시아인가를 배우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어떻게 자녀들을 제자 삼아 말씀을 전수할 수 있는가를 배우면 된다. 전자는 구원사적 접근이고 후자는 교육신학적 접근이다. 

 

4. 혁신적인 대안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종말의 때까지 존재하며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가 생물처럼 단명한다면 어떻게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 한인교회는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맹목적으로 서구신학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고  말씀이다. 성경은 구약의 지상명령(창18:19; 신6:4-9)과 신약의 지상명령(마28:19-20)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심정으로 자녀세대를 선교해야 한다. 이 사역은 간단치 않다. 교회들이 각 가정의 부모들을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녀를 신앙적으로 책임지게 해야 한다. 주일학교 선생이 일주일에 한두 시간 성경공부하는 것으로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그 결과적 열매를 소상히 보고 있지 않는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선교신학이 개발되어야 한다. 

필리핀 세부성경대학 학장인 남후수박사는 “지금까지 선교학은 수평선교학이다. 선교의 정의도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 커리큘럼도 모두 타민족, 타언어, 타문화 등을 중심으로 짜여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기민족과 자기 자녀들을 잃어버렸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신약교회가 오래가지 못하고 자꾸 사라지는 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수하지 않고 그 책임을 교회에 떠넘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참람하다. 세계선교의 진원지였던 소아시아와 유럽을 보라. 그곳에 다시 선교사를 보내야 하는 아니러니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언제까지 기독교 선교가 이렇게 지구촌을 뺑뺑 돌기만 할 것인가?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맺는 말

 

초대교회 죽었다. 유럽교회 다수가 죽었다. 미국교회 죽어가고 있다. 한국교회 죽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렇게 일정기간 역할을 하다 소멸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핵심은 선교학의 부재이다. 지금까지 선교신학은 사마리아나 땅끝이라는 수평적 선교에만 귀착되어왔다. 그 결과 선교는 바람처럼 지구촌을 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직선교가 없는 수평선교는 힘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더이상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안은 의외로 단순하다. 먼저 자손 대대로 말씀을 대물림 하는 수직선교의 기초 위에서 열방을 향한 수평 선교를 수행하는 일이다. 이렇게 구약의 지상명령과 신약의 지상명령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교회는 더욱 건강하고 생명이 길며 세계 복음화의 과업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촛대는 결코 지역을 바꾸어가며 교회를 쓰신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지와 무능 그리고 무책임 때문에 파생되는 결과를 하나님의 섭리로 합리화하는 신학을 과감히 배격해야 한다. 

jrsong007@hanmail.net

12/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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