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정신이 담긴 “빼레그레나찌오”서약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지금은 참으로 어려운 때이다. 인류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산불, 태풍, 홍수, 지진 등이 속출하고 많은 인재사고(人災事故)로 인하여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다. 민심은 흉용해져 가며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은 더욱 이웃을 경계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데 선교현장은 오죽이나 힘들까?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한 길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선교든 목회든 아니 그 어떤 일이든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 함몰되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어두움에 우겨 쌈을 당하여도 늘 경성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 십자가가 답이다.

 

1. 십자가에 대한 존 스토트(John R.W. Stott)목사의 해석 

 

십자가는 기독교의 낡아버린 전통적 문양이 아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의 가교이다. 그것은 신구약을 하나로 묶어주며 기독교의 신앙적 상징뿐 아니라 삶의 지침이다. 십자가는 신약사상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축인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독점적인 표지이며 기독교 지침의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왜 우리의 사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지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십자가 없이 우리를 그냥 용서하시지 않는가? 사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인간의 반항,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 사이의 필연적인 충돌에 의하여 야기된다. 우리의 죄와 죄책만의 사죄의 장애가 아니다. 죄책을 짊어진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의 대응 또한 장애물이다. 이러한 양대 장애물은 십자가를 통하여 해소되었다. 십자가의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으로 죄를 폭로하며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대적하는 것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취는 4가지로 압축된다.  

△성전에서의 의식의 의미로 화목(propitiation)이다. △시장에서의 상거래를 통한 의미의 구속(redemption)이다. △법정에서의 사용되어지는 의미의 칭의(justification)이다. △가정 혹은 가족 속에서의 의미인 화해(reconciliation)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성취는 곧 구원의 이미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사랑의 완전함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내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핵심이다.

 

2. 십자가 정신을 실현한 켈트족 수도사들

 

당신의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의 지갑에 언제나 한 두 개의 동전이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이미 당신이 천국에 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의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신이 늘 당신 곁에 있기를!   

윗 내용은 아일랜드 켈트족(Celtic)의 축복 기도문이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5-7세기 경 켈트족 수도사들은 유럽 대륙에 기독교 전파를 가져온 해외선교의 선두주자였다. 그들은 선교사로 떠날 때 “빼레그레나찌오”라는 서약을 했다. 그러면 마치 프랑스 국기와 모양이 비슷한 3가지 색으로 된 조그만 깃발을 달아주었다. 그 의미는 자기 인생 가운데 3가지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첫째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한다. 둘째는 나에게 익숙한 고국/문화/환경을 포기한다.  셋째는 나에게 편안한 모든 미래를 포기한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희생정신으로 무장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독일과 벨기에 등 유럽의 북서쪽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빼레그레나찌오”의 놀라운 위력이었다. 

성령의 역사는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를 태워서 죽이는 ‘심지’가 필요하다. 켈트족 중 부름 받은 선교사들은 자기를 산화하는 하나의 심지 역할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신을 받으셔서 놀랍게 사용하셨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사역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포기하고 하나의 제물로 바쳐졌다. 헌데 우리는 십자가의 상징인 희생과 포기보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 부귀영화를 얻으려 한다. 코람데오! 모름지기 구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해야 한다. 잔꾀나 계산을 앞세우면 안 된다. 목회든 선교든 자칫하며 중심을 잃고 과업 지향적이 되기 쉽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며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인간이 앞서고 십자가의 주님은 뒷전이 된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그러면 인간의 찬사와 박수가 터진다. 십자가의 주님 없는 사역은 한낱 인간의 비즈니스와 다를 바 없다.  

단기간에 인간의 열심으로 이루어진 바벨탑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런 곳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십자가는 자기희생이며 포기이다. 이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의  좌표이며 모든 영역에 중심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이며 성화되는 수단이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우리가 증거 할 주제이며 자랑할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시각을 항상 십자가의 주님께 맞추어야 한다. 

십자가는 결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십자가 없는 선교와 목회는 요란한 소리만 날 뿐이다. 그곳에는 화려할지언정 생명의 태동은 없다. 이 십자가의 신앙이 우리 목회와 선교현장 가운데 동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오늘날 성도들의 가슴속에 십자가가 빨갛게 불타고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가 정화될 것이다. 선교현장에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빼레그레나찌오”란 켈트족 중 선교사로 부름 받은 자의 서약이다.

이는 주님나라를 위해 가족, 환경, 미래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100마디 말보다 저들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맺는 말

 

지난 2천년간 교회역사를 돌아보면 선교는 철저히 대가를 요구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우연히 아무데서나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십자가의 희생이 있는 곳에서 역사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지만 처절한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속하셨다. 초대교회 역시 사도들의 고난을 통해 부흥 성장했다. 위의 언급한 켈트족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근세 이름 있는 선교사들은 모두가 자기희생을 했다. 일제 시대 민족의 선각자들이나 현대의 수많은 종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초개(草芥)같이 바쳤다. 그 이면에는 가족을 돌아보지 못한 눈물 나는 사연이 있다. 그 신앙은 결코 어떤 것에도 대치할 수 없는 순명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불타는 신앙고백과 희생은 참으로 숭고한 것이었다. 이 절대적인 십자가의 신앙이 오늘 COVID19로 힘들어 하는 선교현장에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다. 

20세기 상반기에 ‘강해설교의 제왕’으로 평가받은 영국의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자랑하며 전하고 있는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빼레그레나찌오”적 희생을 하고 있는가? 선교는 십자가이다.

jrsong007@hanmail.net

10.1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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