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만취상태에서 잠을 깨는 사람들은 눈을 뜨는 순간 냉수를 찾는다고 한다. 애연가들은 눈을 뜨자마자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잠자리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펴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아침은 기도로 시작된다. 눈을 뜨는 순간 나는 감사의 기도를 맨 먼저 드린다. 그 기도의 내용은 지난밤을 평안케 하셨음과 사지백체, 오장육부, 이목구비의 정상적 활동과 그리고 찬란한 태양빛으로 시작되는 그 날 하루의 삶과 조건들을 감사드리곤 한다. 다시 말하면 지극히 일상적인, 그래서 어제도 경험했고 오늘도 경험하며 살아갈 그 사건들에 대하여 감사드린다. 대부분 우리의 감사는 결과론적일 때가 많다. 다시 말하면 돈을 벌었기 때문에,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돈 다발을 손에 쥐고, 합격통지서를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회전의자를 돌리면서 감사를 드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조건적이며 반사적 감사에 불과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감사의 근원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 은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큰 물줄기인 것이다. 구약의 경우는 대체로 감사가 제사행위로 표현되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물량적 제사가 요구되곤 했다. 다시 말하면 감사 제사는 반드시 물질이 포함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제사는 그 기본 자세가 감사와 감격으로 단장되어야 했다. 예를 들면 찬양은 입술로 드린다. 그러나 구속의 은총을 감사하는 신령한 마음이 제외된다면 그것은 가요나 가무일 뿐 찬양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구약에 열거되어 있는 모든 제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제사의 대상이시다. 바로 이 점이 조상 제사와 다른 점이다. 우리네 전통 제사의 대상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격적 존재일 수 없고, 인격적 교감의 성립도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조상 제사의 근거를 성경 제사에 두고 합리화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수시로 받는 상담 요청 중에 빈소나 무덤에서 절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묻는 질문들이 많다. 그 행위 역시 절하는 사람들 쪽에 문제가 있다. 이유는 절을 받는 대상이 인격적 존재인가의 문제를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내가 사는 집 뜰 안에 서 있는 나무라고 해서 거기에 절을 하는 사람은 없다.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을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감사의 대상 설정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풍년을 구가하는 풍년제의 경우는 감사와 제사의 대상이 해와 달과 그리고 자연이다. 그러나 해와 달과 비와 이슬을 적기에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는 감사 부재와 실종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고도의 갈등과 긴장이 우리 시대를 점령하고 있는 가하면 반목과 미움으로 치장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감사가 없다. 자녀들은 부모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백성은 국가의 큰 울타리에 대하여, 교인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외국어가 서툴렀던 어떤 여행자가 세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단 두 마디의 적절한 구사로 비교적 순조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두 마디란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였다는 것이다. 교회는 감사 공동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시인의 노래는 천국 시민의 의무가 무엇임을 밝혀준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서 부는 노래, 일상성 속에서 부를 노래,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불러야 할 노래, 그것은 감사의 노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