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언어생활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모든 생물은 자신의 존재나 의사, 감정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소리를 지른다든지 몸짓을 하고 꼬리를 흔든다든지 꿈틀거린다든지, 각기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이 있다. 그러나 언어 표현 방법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것이다.. 초목이나 짐승이나 곤충에게는 정돈되고 조직화된 언어가 없다. 사람만이 말을 하고 산다.

언어란 전통적으로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에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의 독특한 가치관이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언어와 더불어 느끼며 언어 속에서 존재한다. 언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첫째, 더러운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더럽다는 것은 부패했다. 쓸모없다. 유익하지 않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는 쓸모없고 무익한 말이 많이 있다. 깨끗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고 유익하지만 더러운 것은 해가 되고 덕도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언어 순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사회 불신과 불안이 고조될수록 은어나 비어 혹은 속어가 유행하는 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말 아닌 말, 덕스럽지 않는 말, 유익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은혜가 되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은혜라는 말은 매력적인 것, 언제나 사랑스러운 것을 뜻한다. 은혜가 되는 말이란 언제나 사랑스럽고 매력이 넘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할 때, 그 말은 은혜로운 말이 되고 매력 넘치는 말이 된다. 내가 던진 말 한 마디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거나 깊은 고뇌에 빠진다면 그 말은 은혜도 아니고 매력도 아니다. 교회는 은혜스런 말이 넘치는 곳이라야 한다. 듣는 사람을 격려하는 말, 신앙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한다. 우리의 말로 가정과 교회를 은혜롭게 하자. 그리고 사회를 은혜롭게 만들자. 셋째, 복음 전하는 말을 해야 한다. 예수에 관하여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하여 시침을 떼는 사람들, 절망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한숨만 쉬는 사람들, 입은 있지만 말은 없는 사람들이다.

의미를 담아 외치는 소리가 웅변이라면 그보다 더 웅장한 웅변은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시대는 병들고 불행한 시대다. 진실을 깨달았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온갖 걱정, 근심, 긴장과 대립이 사라진다. 복음진리를 전하자.. 죽은 영혼들이 살아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을 해야 한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는 삶이다. 다시 말하면 찬양하고 높이던 대상이 달라진 것이다. 화제의 주제가 달라지고 예수가 대화의 내용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속자 예수를 높인다. 이유는 예수가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셨고 그가 태초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언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고유한 선물이다. 언어가 인간 고유의 기능이라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크다는 것을 전제한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어느 말이 진실이고 비진실인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언어의 진실은 행위의 진실을 통해 증명된다. 말을 보아 삶을 알고, 행위를 통해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언행의 일치는 크리스천 삶의 최고 덕목이다. 언어의 부도시대 속에서 크리스천만이라도 언행의 진실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축복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신앙공동체다. 덕스럽고 은혜스러운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다. 언행이 일치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곳이 교회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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