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과 교회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현대인 모두는 ‘결핍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자원, 식량, 산소 등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서 가치, 정신, 신앙 등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넉넉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여유도 없고 삶의 여유도 없다. 그 결과는 뻔하다. 각박하고 살벌한 경쟁적 삶의 양상이 풍미하고 있다.

문제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들이다. 돈이 모자라면 아껴 쓸 수 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 어느 정도까지의 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 빈곤이나 나아가 영적 결핍증은 해결의 길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결핍의 근원이 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이 마구잡이로 버린 산업 쓰레기나 화학 폐기물들이 환경을 망가뜨리고 나아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몸살하고 죽어가는 환경과 함께 인간도 죽어가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타락한 심성이 그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풍요로운 것이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동산의 정경은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는 경관의 아름다움만은 아니었다. 악이 없는 세상이라는 점이 그 동산의 심미(審美)였다. ‘주미’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지만 그러나 악이 미적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인간의 악이 에덴동안의 환경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생명을 잃어버린 적막의 동산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환경 파괴의 역사는 산업화의 부산물만은 아니다. 이미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던 창세기 3장에서 환경 파괴는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모든 빈곤이나 결핍의 원인은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되었고 태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고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염려의 한계를 넘어 생존문제와 직결되기에 이르렀다. 경제 전문가들과 환경 연구가들 그리고 미래학자들은 이러한 심각한 국면들이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계6:6)라고 했다. 이것은 식량 가격 폭등에 대한 예언이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는 매년 수백만 명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구촌 한쪽에서는 식도락을 즐기고 향락 산업이 번창하는 모순이 전개되고 있다. 제아무리 내 것이라고 해도 내 멋대로 쓸 권리는 없다. 그것은 반사회적 작태일 뿐이다.

교회는 풍요로운 마음과 영혼을 일구는 터전이었다. 경쟁과 긴장과 연속되는 삶의 경주를 잠깐 멈추고 자신의 영성을 되찾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는 쉼터다. 우리가 사회 현장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들이 있다면 그것은 “모아라, 벌어라, 축적해라”다. 그리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뛰고, 달리고, 싸운다. 그러나 교회 창틈으로 들리는 음성들은 “바르게 벌어라, 주라, 쓰라”다.

세간에 교회가 부를 축적하고 귀족화해 간다고 혹평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성격이나 생리를 모르고 만들어내는 억측일 뿐이다. 교회가 소유하는 부는 없다. 있다면 선교나 교육, 그리고 봉사를 위해 잠시 모아둔 성도들의 헌금일 뿐이다. 만일 개인적으로 교회의 헌금을 챙긴다든지, 사적으로 남용하거나 축적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사이비 집단이거나 탈을 쓴 위선자일 것이다.

차제에 교회가 너무 많다느니, 섰다 하면 교회라는 등의 비난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술집보다는 교회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 도대체 수십억씩을 들여 꾸미는 대형 술집이나 호화 유흥장에 대해선 말이 없으면서도 교회만 유난히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에 거는 기대와 질시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를 향한 사시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로서의 위상 정립에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역사 현실 위에 그 몸체를 세우고 존재한다. 현실을 외면한다든지 사회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태도와 위배된다. 신앙의 힘은 각박한 마음과 삶 속에 윤활유를 주입시켜 준다. 그래서 여유있고 넉넉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준다. 바울 같은 경우 “나는 비천과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실토했다. 얼마나 멋진 삶의 자세인가. 그리고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그가 지녔던 신앙과 가치관 때문이었다. 인간이 향유해야 될 영원한 풍요를 지평선 위에서 찾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다. 영원한 것은 영원한 데서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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