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관리(2)-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하는 자기관리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마음을 청결하게, 몸가짐은 단정하게, 입은 무겁게.’ 이것은 한평생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삶의 자세였다. 푸석거리는 머리로 강단이나 사람 앞에 서지 않았고, 유행을 따라 남성복장이 캐주얼화해도 집 밖에선 넥타이를 푼 일이 없었다. 양복 정장은 대부분 검정 계통의 색상을 선택했고 넥타이도 시뻘건 색깔은 피했다. 그리고 늘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고 말을 고르고 삼갔다.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활용하는 피조물이다. 언어와 문자는 전달과 표현의 매체가 되어 개인 대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소통을 이룬다. 그러나 말이 많고 행동이 수다스러우면 득보다 실이 많아진다. 특히 목회자가 지나치게 말이 많다든지, 비아냥대는 말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든지,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습관처럼 늘어놓는다면 신뢰받기 힘들다. ‘입이 가볍다’ 보다는 ‘무겁다’가 좋고, ‘말은 잘한다’보다는 ‘책임진다’가 좋다. ‘서두른다’보다는 ‘신중하다’가 좋고, ‘경거망동한다’보다는 ‘신사도를 안다’가 훨씬 좋다.

문제는 ‘좋다’라는 평가나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뒤틀린 언행 때문에 목회가 바람을 타기보다는 늘 삼가는 것이 옳다고 여겨 의도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보니 ‘우리 목사는 차갑다, 냉정하다, 접근이 어렵다’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목사와 교인 관계는 멀어도 나쁘고 밀착도 좋지 않다. 호칭도 선별해야 한다. 목사가 남자 교인을 형님, 동생 할 수도 있고, 여자 교인은 누님, 동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호칭 설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다 형제요 자매지만 그러나 목사는 목사의 자리에 서는 것이 옳고 교인은 교인의 자리에 서야 질서가 망가지지 않는다.

요단 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과 뒤따르는 사람들의 거리는 2천 규빗이었다. 뜻하는 바가 크다. 특히 여자 교인들과의 경우 2천 규빗도 훨씬 넘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 흔한 악수도 여자 교인이 먼저 손을 내밀 때로 국한했고 포옹은 일절 피했다. 이 부분을 소홀히 다루면 함정에 빠지고 올무에 걸릴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을 유의하고 명심해야 한다. 매주일 저녁 예배가 끝나면 교

역자들이 함께 모여 주일예배와 행사, 교회학교 진행 등을 검토하는 모임을 갖곤 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목회 전반에 관한 자세를 고쳐 세우는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일례를 들면 운전석 옆자리는 ‘오너드라이버일 경우 부인 좌석이다. 부득이한 경우 목사 부인이 심방에 함께하지 못하고 여권사나 구역장이 동행하게 된다. 동행자가 한 사람이더라도 뒷좌석에 태운다. 세 사람일 때도 옆좌석은 비워둔다. 그리고 네 사람이 동행하게 되는 경우라면 운전석 옆 자리는 제일 나이 많은 권사가 자리 잡도록 한다’, ‘여자 교인과의 사적인 통화는 삼간다’, ‘오해받을 만한 만남은 갖기 않는다’ 등 자기관리에 관한 지침을 주곤 했다.

때로 식사대접을 받을 때가 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목사님, 뭐 드실래요?”라고 물으면 “저는 설렁탕을 좋아합니다. 설렁탕 먹겠습니다.” “아니지요. 모처럼 대접인데 좋을 걸로 드시지요.” “아닙니다. 설렁탕으로 하십시다. 그리고 오늘 식사는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품위를 떨구지 말자는 의도였다. 대접하는 사람이 주머니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불갈비를 찾는다든지 스테이크 메뉴를 주문한다면 대접하는 사람은 어떤 입장이 될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대접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임의로 결정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교인들과 상담을 하게 된다. 필자 역시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과 상담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가운데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교인들과의 상담 내용, 특히 속 깊은 상담을 발설한 일이 없다. 하루 만에 상담 내용이 광포된다면 누가 찾아올 것이며 상담을 요청할 것인가? 그리고 망가진 신뢰의 탑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목사의 자기관리는 두 방향에서 점검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다. 그리고 신앙, 인격, 품위, 언행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아무개도 설교도 목회도 잘하는데 버릇이 없다, 아무개는 설교도 목회도 잘하는데 버릇이 없다, 아무개는 도도하고 목이 곧다, 아무개는 인사성이 없다 라는 평을 듣는 것은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세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머니가 필자에게 주신 여러 가지 삶의 교훈 가운데 ‘원수 맺지 말라, 정직해라, 욕먹을 짓 하지 말라’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 세 가지를 늘 머리에 입력시키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 정신과 삶의 철학을 이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장도 자기관리에 실패하면 내려앉아야 한다. 목사도 자기관리가 부실하고 마무리가 서툴면 중도하차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목회 기간이 길었는가, 짧았는가? 대형교회인가, 소형교회인가를 떠나 사람다운 사람, 목사다운 목사로서 자아를 통제하고 관리했다면, 자아 발전을 위해 영육 간에 피나는 노력과 인내를 쏟았다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개는 정도목회의 길을 걸었다고 손을 들어준다면, 행복한 목회자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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