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관리(1)-목사다운 목사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목회를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목회를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속단하는 것은 옳은 발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공과 실패를 재는 가늠자가 제각각이고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반적 인식은 많이 모이고 건물이 방대하고 예산이 많은 교회를 대형교회로 그리고 성공목회라고 지칭한다. 솔직히 목회란 성공이나 실패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현장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로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대형교회가 되기까지는 때와 장소를 잘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목회자의 땀과 눈물 그리고 각고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과 절망의 언덕을 넘어야 했고, 아픔과 시련의 계곡을 건너야 했다. 그렇게 일궈낸 성공을 난도질하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목사다운 목사

50여 명이 모이는 교회의 경우 지역 환경과 여건 때문에 성장장애의 벽을 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50명을 올곧게 양육하고 청지기로 키우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돌파구가 열리고 성장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교회는 목회자의 신앙과 최선을 다하는 열정에 의해 좌우된다. 교인이 50명이라는 이유로 양육과 돌봄을 내팽개치고 목양을 소홀히 한다면 50명도 점차 감소되기 마련이다.

대형교회 목사라고 큰소리쳐도 안 되고 소형교회 목사라고 몽니를 부릴 필요도 없다. 그런 면에서 목사의 자기관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26세 되던 해 가을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임직 후 선배 몇 분을 인사차 방문했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에게 “제가 목사로서 어떻게 살고 일해야 할지 한 말씀 해주시지요”라고 했더니 “목사다운 목사가 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시오”라고 말해주었다. 필자는 일평생 그 말을 뇌리에 새긴 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다운 사람 찾기가 힘들어졌다. 목사다운 목사, 교회다운 교회도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 리더십이 흔들이고 교회가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는 것은 목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덜 된 사람들 때문이다. 물론 반기독교 집단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공격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관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목회자로서 ‘다움’을 지키는 것이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회의장으로 가고 있었다. 회의 책임자로서 그날 다루어야 할 서류들을 뒤적이며 보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필자를 바라보며 “실레합니다만 혹시 목사님이세요?”라고 묻기에 “아, 네. 그렇습니다만 저를 아십니까? 교인이세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닙니다. 저는 교인도 아니고 손님을 오늘 처음 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런데 어떻게 제가 목사인줄 아셨습니까?”라고 묻자 “분위기가 목사님이신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다. 예기치 않은 대화였지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그때 필자의 인상이 조폭두목이나 절도 도피범으로 비치지 않았다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늘 성난 얼굴, 싸우려는 몸짓, 덤빌 듯한 표정, 거친 말투 이런 것들이 목회자의 모습이 되면 안된다. 그런 면에서 최후의 순간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스데반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성격이나 생김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아 태어난다. 그러나 후천적 노력과 관리에 따라 개선도 교정도 가능하다. 내성적 성격으로 의기소침하고 대인기피증이 있는 목사가 있었다. 교인과 마주앉아 원만한 대화를 하기가 어렵고, 설교 시간에도 회중석을 바라보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담임목사실로 들어가 버리는 그를 교회가 반길 리 없었다. 그 교회 목회를 시작한 지 3년 되던 해부터 교인들의 불평이 이 입, 저 입으로 건너다니면서 목회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가 마주 앉아 어떻게 할까를 얘기하다가 내린 결론은 ‘갈 곳이 없다. 가본댔자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다. 그렇다면 목사가 변해야 된다’였다. 그리고 한 가지씩 고쳐야 될 것들과 바꿔야 될 것들을 노트에 적고 고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잠잠해지고 목회현장은 안정되어 25년 목회를 끝으로 수년 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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