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성기 목사 (필라안디옥교회담임)
참으로 무서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47%가 주일학교나, 중고등부나, 대학청년부가 아예 없다고 합니다. 미국내의 한인교회는 건강합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이 10명중 9명은 대학에 가자마자 즉시로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빛과 소금되는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 보다 세상을 더 알려하고 세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탄식하는 많은 것 중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구나’(요4:48)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돌아오셨을 때 왕의 신하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신하는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아들이 죽기 전에 가버나움에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구나’(요4:48)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왕의 신하에게 선포부터 먼저 하셨습니다. ‘네 아들이 살아나리라’(요4:50). 예수님은 절대 왕의 신하의 요청대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버나움까지 가셔서 그 아들을 살려주는 기적을 먼저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저가 그 기적을 보고 믿지 않게 하시려고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먼저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은 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라’(요4:50). 먼저 믿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였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는 자는 다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 알기 때문이 아니라, 믿는 자는 바램이 있기에 소망이 주님께 있기에 순종합니다.
마태는 이 신하를 똑같이 ‘백부장’이라 하였고 그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다고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마8:5-13). 누가는 이 왕의 신하를 똑같이 ‘백부장’이라 하였고 아픈 사람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강청하러 간 장로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그 집에 가서 그 종을 고쳐주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은 그 집까지 오시는 수고를 감당할 수 없어 말씀만 하시면 집에 있는 하인이 낫겠다고 믿었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먼저 믿고 표적을 보았습니다. 10명의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다 고침받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저들의 나병은 절대로 그때 즉시 낫지 않았습니다. 표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은 나병환자가 다 나았을 때 가서 확인을 받아야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레14장).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려고 순종하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눅17:14).
믿고 표적을 보았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순종할 때 표적을 보았습니다. 내 눈으로 보아야 믿는 시대입니다. 보지 못하면 절대 믿지 않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교회가 좀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다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고 욕하고 떠나갑니다. 보는 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목사 한 사람이나 성도 한 사람이 좀 잘못하는 것을 보면 그 시간으로 정죄하고 돌아서 버립니다. 참지 못합니다. 보는 대로 믿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잘못하는 것을 절대로 덮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이 시대의 특징이 ‘보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고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히11:1)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바램입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다 잘못되고 다 파괴된 곳에서도 믿음은 보이는 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듣는 대로 다 믿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가닥 소망을 가지고 바라고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고 믿지 않습니다. 믿고 봅니다. 믿으면 보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살립니다. 어떤 성도가 좀 잘못하였어도, 어떤 목회자가 좀 실수를 하였어도 그 실수하고 죄 지은 곳에서도 치료하시고 고쳐서 쓰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를 지은 사람은 철저히 회개하고 근신하고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타락한 영성은 죄인을 대하는 태도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기분으로’ 판단하고 삽니다. 보고 믿습니다. 믿고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보았다는,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는 나다나엘에게 ‘내가 보았다 함으로 네가 믿느냐?(네가 보지 않고 믿으면)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도 보리라’(요1:48-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은 바로 가서 나사로를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유하시고’(요11:6) 죽고 나서 가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은 가시면서 ‘너희로 믿게 하려고 내가 가지 않았다’(요11:15)고 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통곡하고 울고 있을 때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너무 기분이 나빠서 ‘죽은지 사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잖아요?’(요1:39)라고 핀잔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고 선포하셨습니다. 보아야 믿는 타락한 시대는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대가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인이어서 악합니다. 그래서 보아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은 ‘먼저 믿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1:29)라고 하셨습니다.
‘보고 믿는’ 단계에서 ‘믿고 보는’ 신앙의 성숙이 필요한 때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음으로 ‘네 믿음대로 되리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선포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믿고 보는 자’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를 살릴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성도를 성도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