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절의 교훈

(누가복음 10:25-37)

최해근 목사 (필라몽고메리교회 담임목사)

가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다 보면 기내방송을 통해 긴급하게 의사나 간호사를 찾는 안내방송을 듣게 됩니다. 지난 2010년 11월에 LA발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임산부가 출산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긴급하게 의사나 조산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임산부를 돕게 될 경우 미국법은 응급에 처한 환자를 돌보는 행위에 대해 추후 책임의 유무를 묻지 않도록 하는 법이 있습니다. 바로 이 법이 ‘선한 사마리아법’으로 불려집니다. 의료행위 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식품을 자선 기관에 기증했을 경우에도 이 음식이나 식품에 대해서 면책이 될 수 있도록 1996년 10월에 클린턴 대통령이 법제화시켰는데 이 법 역시 ‘선한 사마리아법’(Good Samaritan Law)으로 불려집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우리에게 친숙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선한’이라는 표현은 본문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붙인 형용사이고 성경본문은 단순히 ‘사마리아’ 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친숙한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셨던 그 중심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이 이야기를 말씀해주셨던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론이 나올 수 있으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좀 더 분명하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야기에는 강도만난 사람과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강도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에 비해 그 옆을 지나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회적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당시 사회에서 느끼고 있었던 특정한 분위기를 가져오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어떤 종류의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혹 그의 사회적 신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반면에 그 옆을 지나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사장이거나 레위인 혹은 사마리아 출신 사람이었다고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직업이나 신분 혹은 그 출신배경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냥 강도만난 사람 옆을 지나가던 첫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그리고 세 번째 사람으로 표현한 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세 번째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도 충분히 어려움을 당한 약자를 돕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보면 강도만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반면에, 그 사람 옆을 지나갔던 사람들에 대해서만 신분을 표시함으로써 주님이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비슷한 내용의 현대판 이야기를 구성해보겠습니다.

현대판 재구성, 그리고 그 의미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심야업무를 마치고 이른 새벽에 집으로 가는 도중에 뺑소니 차량에 치여 심하게 부상을 입고 길 가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대학교 총장이 자동차를 타고가다 둘러보고는 아침 강의준비 때문에 그냥 지나갔고, 얼마 후 고등학교 교장이 그 옆을 지나가다 사고를 당한 행인을 보고는 교직원 회의를 핑계로 모르는 척 지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가난하고 일자무식의 패지수집상 할머니가 리어카를 몰고 지나가다 사고를 당하고 버려진 행인을 발견한 후 자신의 리어카에 그 사람을 모시고 급하게 병원으로 가 환자의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교육받은 사람의 위선과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것입니다. 총장과 교장이 피해간 사람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하고 무식한 할머니가 구했다는 사실을 통해 지식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무능력에 대해 말없이 느낌으로 전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방법이고 내용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제사장과 레위인을 사용하여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의 사람을 표현합니다. 강도만나 거반 죽게된 사람을 살려야 되는 이 긴급하고 중요한 일에 있어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실패합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죽은 시신을 만지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유대교적인 내용입니다(민19:11-13). 시신을 만져서 부정케 되면 7일 동안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결의식을 거쳐야 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힘들어서 피해 갈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적인 이유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자료들, 예컨대 율법을 해석한 미쉬나 나지르 7장에서는 대제사장이나 나실인으로 서원을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친족이 아닌 여행 중에 우연하게 발견한 버려진 시신을 만지는 것은 부정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자신들의 성전봉사를 이유로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갈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은 당연히 베풀고 행해야 할 사람 살리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름 아닌 당시 유대교의 상징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실패는 유대교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사마리아인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하필 사마리아인을 가장 배울만한 인물로 묘사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마리아인 대신에 그냥 갈릴리 시골 사람이라던가 여리고 근처에 살고 있었던 동네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굳이 사마리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가장 천박스럽고 무식한 그런 사람들, 소위 말하는 ‘잡것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인 자신들과 같은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하지만 이방인들과 혼혈결혼을 함으로써 스스로 그 혈통적인 정결함과 순수함을 포기해버린 선조들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류에 속한 사마리아 사람을 언급하여 가장 영웅적인 행위를 한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것 자체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치욕적이고 수치스럽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점을 통해 주님의 심중에 계신 중요한 진리를 표시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천하고 가까이 하지 못할 사마리아인과 같은 자리에 주님 자신을 두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강도만난 사람이 생명을 구하지 않았던가!! 나는 세상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마리아 사람이며 나는 그 일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결론 감사절을 지내고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한 사람에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 분은 사마리아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갖은 수모와 치욕을 받아가며, 인생의 강도를 만난 우리를 살려내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돈으로부터의 강도, 권력으로부터의 강도, 성으로부터의 강도. 지난 상처로부터의 강도... 우리 모두는 다양한 종류의 강도를 만난 그런 아프고 깨진 삶을 살았던 그리고 살아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두 손을 펴시고 사마리아인의 인생이 되어 아프고 쓰라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에게 감사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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