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호 목사 (필라 순복음중앙교회)
세상사는 희비가 있고 때로는 자기만 겪는 삶처럼 생각하다가 인생을 포기하는가 하면 아무리 삶이 고달파도 칠전팔기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도전해가는 사람들도 있다. 본문에 엘리사는 요단강 골짝에서 하늘을 지붕 삼고 그림자를 벗 삼아 농사를 짓는 무명 농부였다. 어느 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엘리야를 스승으로 모시고 동고동락 반세기 북왕국 예언자로 나중에는 스승 엘리야 따라 갑절의 영감을 받아 외국까지 그 명성을 떨친 것을 볼 때 신앙생활에서도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1. 엘리사는 스승을 따라 길갈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가던 중 요단강이 가로막혀 하나님께 간구하여 요단강이 갈라지고 무사히 거친 곳으로 여호수아가 12돌을 취해 12지파를 상징해 동편 길갈에 두어 하나님의 능력을 자자손손 기억케 한 곳이다. 길갈의 뜻은 ‘회전한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인생은 돌고 도는 세상이라,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가 될 수 있는 세상이기에 과시하거나 체념할 것이 못되는 것이 인생사다. ‘길갈’은 영적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되는 곳이다. 신앙의 정도는 말씀에 의지하며 사는 삶이다. 말씀이 수면제요, 세상 말은 이골이 나서 남의 허물만 하는 것은 병적인 사람이다(마7:1).
2. 스승을 따라 벧엘로 갔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해서 처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이다. 야곱도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 중 이곳서 노숙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곳이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데 신앙연조, 직분 가졌어도 말씀을 모를 때 시각 장애자가 시각 장애자를 인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 스승을 따라 여리고로 갔습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하던 중 철웅성 여리고 성 앞에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일곱 번째 돌던 날 하나님의 능력으로 비무장, 비폭력으로 무너뜨린 곳이다. 오늘날 성도의 길이 길갈과 벧엘을 통과했지만 더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가려면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여리고 성을 무터뜨려야 한다.
여리고는 ‘향방’이란 뜻인데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우겨쌈을 당해도 장미의 향기는 변함 없듯이 성도는 기도의 향(계5;8), 전도의 향(행1:8), 충성의 향(계2:10)을 날리자. 신앙생활이란 방학도 휴가도 없는 전천후의 마라톤 경주와 같다. 오늘날 학, 박사 부귀영화가 천국 길이 아니며 구원 받는 길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신 삶이 복된 삶이다. 순종했던 사르박 과부, 아브라함, 기드온 300명 용사, 히스기야 왕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때 묻으면 씻을 줄 알고 떨어지면 기울 줄 알고 금가면 붙인 줄 알면서도 죄악된 심령의 때는 군살이 찌게해서는 안 될 것이요 100년을 산대도 이 세상은 부업이요 신앙은 본업으로 알고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마시고 참이 아니면 보지도 맙시다. 차던지 덥든지 결단성 있는 믿음(계3:15)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도록 힘씁시다.
4. 엘리사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멈추지 않는 스승, 오지 말라며 뿌리치는 스승을 따라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으로 따라갔던 결단성 있는 엘리사였습니다. 변덕이 죽 끓 듯하는 갈대 같은 신앙, 유람선 신자. 지식 없는 교만자, 지식있는 교만자 되지 말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빌2:3), 예수님을 배워서(마11:29), 행동하는 믿음의 성도가 됩시다(야1:2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히11:6), 하나님의 일꾼들은 뒤로 물러가면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히10:38). 인생은 급행열차를 타고 쉬지 않고 가는데 세상에서 명예, 색욕, 물질 좋아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오라하니 다 가고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후사요 천사도 흠모하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롬8:17, 벧전2:9),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히12:2).선진들의 뒤를 따라 달려갑시다(마16:24-26).
5. 엘리사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에 당도하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개의 강을 도강했는데 홍해는 죄를 씻는 세례상이고 요단강은 성령 세례를 상징한다. 요단강을 건너간 것은 불신앙을 청산, 하나님 중심으로 가나안에 새사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스승과 제자가 요단강을 건너 대화 중 불말이 나타나 두 사이를 떨어지게 한 후 회리바람을 통해 엘리야는 산 채로 승천하면서 겉옷을 떨어뜨려 엘리사는 자기 옷을 찢고 엘리야의 곁 옷을 주워 은사를 받아 스승 못지않게 많은 이적 기사를 행하였던 것이다(왕하4:9).
오늘의 시대를 불안과 혼돈의 시대라 한다. 세상 향락을 쫓던 소돔 고모라, 정욕을 쫓던 바벨탑, 명예 오락을 쫓던 로마, 그들의 망한 이유가 하나님의 법보다 인간의 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출애굽 민족이 그들 앞에 축복의 땅보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고 원망 불평으로 죽음을 자초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이들 조상 청교도들의 비싼 대가가 지불한 데서 영국보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아브라함이 골육친척 버리고 외로운 여정 속에 아들까지 제물로 받치려는 믿음이 축복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 풍요 속에 빈곤은 ‘에로스’ 사랑이나 ‘스톨르게’, ‘필리아’ 사랑보다 하나님의 법인 “아가페” 사랑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공수래공수거 인생(전1:), 내일을 모르는 인생(잠27:1),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꿈같은 인생(욥20:8), 아침 안개(야4:14) 같은 인생이지만 심은 대로 거두고(갈6:7), 일하기 싫어하는 자 먹지도 말고(살후3;10). 성실과 최선을 다 할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8).
개미처럼 자기만 모으고, 거미처럼 자기만 먹지 말고, 꿀벌처럼 자기도 주인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는 삶을 삽시다. 어디서나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하고 필요로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삶을 살려는 의지와 노력을 우리 모두 사명으로 알고(눅10:25-37) 삽시다. 목사, 제직, 성도답게 소금과 빛의 사명 망각치 맙시다.
영국 처칠 수상이 옥스포드대학 졸업식 강연에서 세 번이나 ‘포기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하늘 영광 버리고 세상에 오시어 36차례 매를 맞으며 십자가에 여섯 시간 매달리어 가진 수모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포기 않음으로 멸망 받을 인류를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 수많은 선지 사도 성도들이 십자가를 포기 않고 승리의 자취를 남겼다.
스승 엘리야는 세 번이나 ‘너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 했었지만 끝까지 스승을 따름으로 길갈에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여리고서 하나님께 깨어진 재물이 되어 요단강서 갑절의 영감을 받았듯이, 기회를 잘 포착하고 자기 중심의 구습의 옷을 찢었다. 누구에게나 있는 십자가 지고(마16:24-26) 여러분의 교회와 삶의 터전에서 포기 않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며 맑고 환한 활기찬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