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고난, 크나큰 영광

(고린도후서 4 장 16-18절)

강세대 목사 (프린스톤 한인교회)

비교하지 않는 것은 좋습니다. 비교하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큰가 작은가, 넉넉한가 부족한가, 건강한가 건강하지 못한가, 평탄한가 고생스러운가…비교하면 참된 기쁨이나 만족이나 감사와 같은 행복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마귀는 비교하도록 충동질합니다. 비교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의 덫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 시민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사는 데 필요한 일년 수입이 얼마인가를 어느 연구기관이 발표했습니다. 7만5천달러라고 합니다. 물론 가족의 수나 사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그 연구 발표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돈의 양에 비례해서 누리는 행복이 커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액수의 돈을 넘어가면 넘는 그 돈의 액수는 행복과 관계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보도를 보면서 제가 드린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모든 가정들의 수입이 적어도 7만5천달러가 되게 하시고 그 수입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그 이상의 수입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사용하는 복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가 누리며 유통하도록 허락하시는 진정한 복을 비교함으로 빼앗기지 않아야합니다. 비교하지 않도록 늘 우리의 마음 과 생각을 기도와 말씀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은 비교입니다. 강하게 비교하여 가르칩니다. 16절은 “겉사람”과 “우리의 속”, 곧 속사람을 비교합니다. 17절은 환난과 영광을 비교합니다. 18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비교입니다. 세 구절에서 세 가지를 대조하여 비교합니다. 비교의 중요성을 강조함입니다. 비교하지 말아야할 것은 비교하지 않아야 하지만 비교해야할 것, 비교함으로 믿음 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은 비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겉사람과 속사람”의 비교입니다.

겉 사람은 태어날 때 주어진 자연인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 겉사람은 “후패하나”, “후패한다”는 선언입니다. ”후패하다”는 “썩어서 쓸모가 없게 되다, 낡아지다, decay, waste away, perish”입니다. 우리의 몸에 대한 평가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길어야 약 20세까지 성장하고 자라납니다. 그 후에는 현상유지를 지나 낡아지는 것입니다. 곧 늙어가는 것입니다. 늙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사실 기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사실인데,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인정은 하지만 오늘의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확실히 거듭난 사람 속에는 속사람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성경은 “영의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여주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 영의 사람은 결코 늙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은 나의 속사람이 더욱 힘차게 살아 활동하도록 말씀으로 먹이고 기도로 호흡하며 전도하고 섬김으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영의 말씀을 먹지 않고 영적 호흡을 하지 않고 영적 운동을 하지 않기에 그 속사람이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그 영의 사람이 나의 마음과 인격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비교 “환난과 영광”입니다.

이 현세에는 환난, 곧 어려움이나 힘듬이나 병듬이 나 실패가 있습니다. 이 현세에 환난이 없는 곳은 한 곳 뿐입니다. 무덤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큰 교훈은 환난에 관한 것입니다.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성령님의 강동으로 기록한 바울 사도는 환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환난들을 당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에게 작고 큰 환난이 있을 때 마다 환난을 이겨낸 바울 사도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힘입어 이겨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승리의 비결은 비교입니다. 환난을 무엇으로 비교하는 가요? “영광”입니다.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고생만 했다, 그런 말을 듣습니다. 고생이 가져 온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난이 유익하다”(시119:71)고 증거합니다. 고난이나 환난은 영광 에 동참하게 하는 관문임을 가르쳐줍니다. 그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큽니다.“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입니다. 그 영광에 비교할 때 이 현세에서의 환난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입니다. 장차 받을 영광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잠시, 그리고 경한” 것입니다.

수 년 전 한 사람의 죽음을 전 지구촌이 애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가 56살에 죽음을 맞이했기에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큽니다. 그 분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신문은 “세상을 바꾸고 떠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좀 과장된 말 같습니다만, 그는 정보기술과 컴퓨터 분야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긴 것만은 사실입니다. 2005년 서부의 명문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그가 한 말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은 사람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지 1년이 지난 후에 한 연설입니다. 죽음이 필연임을 알고 깨달을 때 사람은 더욱 값있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암이라는 환난을 겪고 있는 한 사람의 깨달음이었습니다.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입니다. “환난”입니다. 그가 거쳐간 암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도 환난이나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감사하는 것은 그 환난을 능히 이겨내는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입니다. 그 영광을 확신하고 믿고 바라볼 때 어떤 환난이나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보장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환난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담대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승리의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여주시고 반드시 도와주시기에 환난이 있을지라도, 환난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비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성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나 판단에 지배되어 삽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반드시 있다고 증거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천국은 반드시 있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벧전1:7).

“내가 본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가 8일 동안 환상 중에 본 지옥과 천국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분은 “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일 곱개의 동산들을 본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의 동산, 섬김의 동산, 찬송의 동산, 구제의 동산, 눈물의 동산, 고난의 동산, 감사의 동산. 이 현세에서 성도가 실천한 기도, 섬김, 찬송, 구제, 눈물, 고난, 감사가 천국에서 그대로 쌓여서 동산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 개의 동산을 보면서 저자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 현세에서 주님을 위해 바쳐드린 헌신과 정성과 수고의 작은 것까지도 주님께서 다 기억하고 계시며 위로해주시고 갚아주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 분의 책의 내용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 그것을 따지기 전에 꼭 한 가지는 그 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과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편은 이 현세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았는가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 현세에서 주님을 위해 당한 환난은 천국에서는 영원한 영광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현세에서 어렵고 힘든 때, 기억합시다, 이 고난은 잠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장차 받을 천국에서의 영광은 영원히 크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그렇게 믿고 확신하기에 낙심이나 피곤을 이기고 예수님의 기쁨과 평안으로 힘차게 전진해가도록 성령께서 주장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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