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누구라 하느냐?

최동진 목사 (샌디에고 반석장로교회)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는 모티프가운데(12:1-16:4)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2천년 교회역사 가운데 계속되어온 질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이름은 세상과 충돌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1.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14)

(13)“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 분봉왕 헤롯 빌립2세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이며, 디베료 가이사 황제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하얀 대리석으로 거대한 신전을 만들어 바칠 정도로 황제숭배사상이 만연한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누가 진정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가져다주는가? 가이사(황제)외에는 없다고 해야 살아남는 시기입니다. 당시 로마의 평화는 로마제국의 지배계급들에게는 세속적으로 태평성대였지만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로마의 평화유지를 위한 로마의 폭력과 착취로 고통 받는 제국주의 체제였습니다. 위장된 평화놀음에 광분하고 있는 인류역사를 향해 진정한 평화의 시대는 누가 열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질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를 외치던 예수에게서, 외롭고 쓸쓸한 광야에서 지내면서 부패한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을 향하여 ‘회개하라!’를 외쳤던 세례 요한을 떠올립니다. 예수는 어쩌면 세속권력과 지배자들에 의해 억압받던 민중들의 대리 만족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남미에서는 예수를 민중의 혁명자로 둔갑시켜 정치적 해방 신학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엘리야?: 오병이어, 칠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수많은 각색질병과 귀신을 쫓아내셨던 예수의 기적들을 보면서, 능력의 선지자였던 엘리야의 부활을 기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성공과 건강과 부의 증진에 목말라 하는 현대인들은 제2의 엘리야를 기대하고 있기에, 능력종교(power religion)로 붐을 일으키더니, 다른 한편으로 제2, 제3의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은 긍정의 힘으로 위장된 복음을 상품화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하나님의 평화를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장래를 보시고 우셨던 예수님을 보고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보고 피 끓는 눈물을 흘렸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떠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국수주의나 민족정신으로 왜곡, 축소시키는 일들이 역사 속에서도 자행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상처들이 오늘날 이슬람과의 종교전쟁으로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지자 중의 하나?: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권위 있게 풀어헤쳐 설명해주시는 예수에게서 위대한 선지자나 랍비를 연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말씀자체의 권위보다 이상하리만큼 마케팅전략이나 프로그램에 마치 목숨이라도 거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두는 여전히 현대 교회 안에서 예수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16) (15)“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는 ‘주’(the Lord)이십니다. ‘주’는 구약시대 여호와(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한 용어입니다. 곧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요1:1-3).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행위 언약을 맺으셨으며(창3:3), 언약에 실패한 인간을 구속(Redemption)하시기 위해 친히 자기의 피로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주실(창3:15,21) 은혜 언약의 성취자(요19:30)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구속(Redemption)과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일어납니다(고후5:1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오늘도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은 새사람(엡4:24)으로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the Christ)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야이십니다(사11:2-4; 42:1-2; 61:1-3). 이 사실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마3:16-1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은 자들은 이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아름다운 덕(구속의 복음)을 선전하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벧전2:9).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리 천사와 같이 고상한 인품을 가졌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갈1:8). 우리가 전할 유일한 복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사실입니다.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living God)입니다.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친히 이루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은 ‘인자’(:13, the Son of Man, 단7:13-14)로 보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the Son of God)이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DNA를 그대로 품고 있듯이,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2-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요1서2:22; 4:2-3; 요2서1:7).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들이 우리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9면으로 계속> <4면에서 게속> 이것을 막아내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요(골1:18), 예수께서 세우시는 ‘내 교회’(:18)인 것입니다.

3. “네가 복이 있도다”(17-19)

(17-2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께서 자신을 주로,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베드로를 “복 있는 자!”(17)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베드로의 육신적 생각이나 배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하).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도 인간의 행위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증거합니다(엡2:7-8).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 베드로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집니다(18). 한때 이 ‘반석’을 베드로로 잘못 해석하여 인간 베드로가 초대교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세번 부인하는 연약한 인간 위에 교회를 세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반석은 무엇입니까? 그가 신앙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적으로는 유약하며 부족하지만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자들에 의해서 오늘도 주님의 교회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 위에 천국을 매고 푸는 권세가 위임됩니다. ‘매고, 푸는’ 권세는 랍비적 용어입니다. 그것은 토라 해석에 기초한 행위를 허락하거나(풀다), 허락하지 않는 것(매다)을 선포하는 전문용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말씀(토라)이 되시며(요5:39; 6:68), 그 말씀으로 하늘의 비밀들을 열고 닫는 권세를 그의 몸되신 교회 위에 허락하시며 그의 교회들로 그의 나라를 점점 확대해 나가고 계십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2천년 교회 역사가운데 수많은 답변들이 제기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오면서,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 제자들의 wishful thinking에 의해 신격화된 예수의 신화적 요소를 걷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마침내, 로버트 펑크와 존 도미닠 크로산이 주축이 된 “역사적 예수 연구”(Historical Jesus Seminar)는 1세기 팔레스틴 지방에서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조명해보고자 하는 방법론들을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에게 또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바로 그 고백 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교회 위에 오늘도 하늘의 권세가 주어집니다. 바로 그 교회가 복 있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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