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아들, 다시 찾은 아버지

(눅15:11-24)

이훈우 목사 (아르헨티나 중앙교회)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내용 이전에는 잃은 양의 비유와 한 드라크마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 두 비유가 회개경험을 촉구하는 것이라면 탕자의 비유는 이방인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 그리고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하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당시 유대사회 유산은 형은 동생의 2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산은 부모가 죽은 이후에 받게 되지요. 혹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유산을 분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의 소유권과 처분권, 관할권이 모두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부모가 생전에 있음에도 유산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패역한 아들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8절-21절에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고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과 자녀와 자식의 예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에 비추어볼 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둘째 아들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패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자의 모습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청중 중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분노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가서 탕진한 아들을 살인자로 취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로 약 400백만 명에 이르고 있었고 그들은 민족주의자들이라서 서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였습니다. 자신들의 선민사상으로 서로 돕고 협력하는 공동체로 이루어진 사회였지만 결국 이 탕자는 자신의 공동체인 유대인들에게마저 버림받은 자의 취급을 당하고 아주 천하게 여기는 돼지우리에서 주염열매를 먹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너무나 허랑방탕한 탕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째 아들의 모습이 성경 속에 나타난 탕자의 뿐이겠습니까? 이 모습이 바로 자신의 삶을 찾아,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교회나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이전의 우리의 모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아들

본문 17절에서 비로서 탕자 둘째 아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천히 여기는 돼지, 그 돼지의 먹이를 주워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탕자는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의 삶도 재해석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은 마치 돼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마치 돼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떠나온 집을 그리워합니다. 이젠 아들로서가 아닌 아버지 집의 종으로서의 삶을 산다 해도 아버지가 계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가족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족의 품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버지의 집에 종으로라도 살고프다는 간절함을 갖고....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아들을 세상의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탕자의 아버지 모습에서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으로 보낸 것입니다. 아들은 그토록 세상을 원하여 재산을 갖고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세상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 알았지만 아들이 세상을 경험하도록 내보냈습니다. 돼지우리 같은 세상을 경험하도록 손을 놨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하루 속히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날마다 산등성이에서 아들의 모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아버지는 저 멀리에서 터덜거리며 걷고 있는 한 사람을 보자 집을 떠나 그 아들이란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까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릴 수 없어서 아들에게도 달려갑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아들의 모습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이 아들이 그 동네 세상 사람들 눈에 뜨인다면 신명기에 나타난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이 저 멀리서 나타나자 단숨에 달려가 아들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향해 외칩니다. “이는 내 아들이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삶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모습 속에는 아직도 탕자의 모습이 남아 있어 늘 주님으로부터 떠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두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더 맘이 쏠리고 죄악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은 빠르기만 합니다. 이런 우리들이기에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서기만 하면 주님은 어느새 달려와 주님 품에 우리를 안아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앙교회는 그동안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상처가 깊었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들이 다 아물지 않았지만 부족한 저는 “온 성도가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모든 것을 품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며 회복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고달플 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힘을 내며 천국을 소망하며 주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온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속히 돌아오라고 손짓하시면서... 그 주님을 바라보고 그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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