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

(창세기 3:9-13)

김수명 목사 (타코마한인장로교회 원로)

책임감이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국립표준국어 사전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책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생사가 오가는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책임감입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한국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참사사건에서 우리는 책임을 저버린 사람들의 결과가 300여명의 존귀한 생명들을 진도 앞 바다에 수장시키고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가족들의 가슴에 묻는 뼈아픈 사건을 가져왔습니다. 슬픔을 당한 가족들에게 무슨 말로나 물질로도 보상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가져왔고, 온 국민의 애도와 함께 분노를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공소장에 드러난 선장과 승무원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보면, 선장과 승무원 8명은 지난 4월 16일 아침 8시 52분 조타실에 모여 탈출을 모의했다는 것입니다. 여닫이 방식인 선박의 문은 물에 잠길 경우 수압 때문에 열리지 않기 때문에 선박의 2층 높이인 침수한계선까지 물이 차오르면 배를 버리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복원력을 잃은 배는 전복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준석 선장은 “승무원들만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입니다. 승객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이 승객을 살릴 방법과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자신들만 살 방법만을 생각했다니 이것이 객주가 도전이 된 것이고, 확실하게 책임감을 버린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격은 책임 능력”이라는 말을 했는데,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인격이 파산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책임감을 버릴 때 세월호에서 일어난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책임감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창세기 3장에 나타 난 아담과 하와의 사건은 불순종이 인류비극의 원인이었다는 것으로 익히 알고 있지만 또 다른 면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접근을 책임감을 저버린 결과로 인류에게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비극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서로 남을 탓하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12절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주었기 때문이라고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먹고 안 먹는 것은 자기 의사에 결정되는 것인데, 자신이 먹은 것을 하와 때문이라고 남을 탓했습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은근히 원망과 책임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마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둘 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남을 탓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고 아담과 하와 부부간의 관계도 악화된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죄악 때문에 인간세상에 비극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책임을 감당하고 책임을 질 줄 알아야 그 곳에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좋은 관계가 생길 수 있지 책임회피에는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이미 인류에게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책임 회피한 아담 부부의 불화의 관계는 그 집안에는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생산하는 아름다운 인격의 모습이지만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정에 인간이 사로잡히게 될 때 불행을 가져오고 마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할 만큼 사랑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책임을 전가시키는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남녀가 세기적인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고 해도 사랑의 감정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식어져 간다는 것을 너무나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식기 전에 책임지는 관계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감정을 관계보다 항상 앞세우게 되어 서로가 책임을 회피하고 서로 상대를 평가하고 탓하는 관계가 되어 서로가 힘들어지고 결국 갈라서기 까지 되는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일수록 감정에 좌우되지만 성숙한 사람일수록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상대를 탓하기보다 책임 질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과 역사에서 배우는 겸손을 갖지 못하면 개인이든, 교회이든, 국가이든 꼭 같은 실수를 거듭하게 되는 어리석고 비극적인 개인과 단체와 국가와 국민이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레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재임 시절에 있었던 편지 한 장이 공개되었습니다. 남북전쟁 때 게티스버그 전투를 마치고 미드 장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는데, 그 편지는 아주 짧은 내용이었습니다. “미드 장군,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이요, 만약 실패한다면 실패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만약 작전이 실패하면 장군은 링컨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공개하시오.” 책임은 자신이 지고 영광은 부하에게 돌리는 링컨의 마음씀이, 훌륭한 지도자로 존경 받는 이유가 아닐까요.

아무런 죄 없는 예수님이 인간의 범죄와 식어진 사랑을 탓하지 않으시고 주님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신 것은 사랑을 관계로 회복시키고 승화시키신 놀라운 교훈을 오늘 우리 인류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남을 탓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감정이 항상 앞서는 모습에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한 모습이 되어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격의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심각하게 각성하게 우리의 의식에 각인되어야 하는 것은 잘못은 내가 저질러 놓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그런 아주 파렴치하고 수준이하의 저능한 판단을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범죄는 아담 자신이 해놓고 책임은 아내와 하나님께 돌리는 그런 수준이 결국은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과 슬픔과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잘못입니다. 자신의 범죄와 실수를 솔직히 인정할 줄 아는 개인과 국민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레바논에 해병대를 배치했다가 테러리스터의 자살 폭탄공격으로 숙소가 무너져 무려 230여명이 장병이 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 총사령관인 대통령에게 책임을 추궁이 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 국민은 그 누구도 레이건 대통령을 향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을 미국에 사시는 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미 국민들은 오히려 더 단결하여 레이건 대통령을 지지해주었습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아주 돋보여진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책임질 사람이 분명히 따로 있는데 책임을 대통령에게 확대하여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책임을 전가시키는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손자가 식초를 먹었는데 왜 내 이빨이 시려야 합니까? 손자이기 때문입니까? 책임 전가를 잘못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책임소재를 흐리는 질서를 혼란케 하는 범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개인이든 교회이든 국가이든 미숙한 수준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나 가정도 화목하고 국가와 국민도, 국제관계도 평화스러워지자면 남을 탓하기에 앞서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책임질 줄 아는 신앙 인격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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