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삼 목사 (나성제일교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어린 고아라고 생각한다. 고아는 외롭다. 고아는 배가 고파도 밥을 줄 부모가 없다. 추워도 이불을 덮어 줄 부모가 없다. 고아는 나를 사랑하고 보호해줄 의지의 대상이 없다. 그래서 참된 경건은 환난 중의 고아를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약1:2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께 구하여 자신과 똑 같지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6-18).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했다. 그리스도의 영은 곧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그 속에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으며,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동사 3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16절)성령을 따라 행(行)하라, (18절)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引導)하시는 바가 되면... (25절)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살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인가?
1.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은 인격의 영이시다.
이 말은 성령이 어떤 기운이나, 바람, 불, 힘, 파워가 아니라는 말이다. 소는 뿔이 있다. 그렇지만 뿔이 소는 아니다. 물론 성령님은 강한 바람처럼 임하기도 하고, 힘도, 능력과 권능이 있으시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성령이 아니고, 불이 성령이 아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가 가능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인격이 있다는 말은 지 정 의가 있다는 말이다. 지적으로 깨닫고,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있고,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인격이시라는 말이다. 인격의 신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섭섭하게 하거나 근심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4:30)고 했다. 근심할 수 있는 것도 인격이 있어야 근심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과 교제가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하다. 나 혼자서 독백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생각을 언어로 Give & Take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그의 음성도 듣고 인도를 받으며 살라는 말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Good Morning Holy Spirit”이라는 책이 기억난다. 까를로스 목사님은 아침에 일어나서 성령님께 인사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성령님! 오늘도 나의 모든 사람의 주권을 성령님께 드립니다.” 이렇게 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그렇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성령을 따라 성령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된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사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갈5:22-23).
2.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삶이란 성령님을 나의 삶의 행동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광야에서 삶을 보면 그들의 삶은 전적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살았다. 구름 기둥이나 불기둥이 움직이면 그들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이동했고, 만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저들의 전진과 방향의 기준을 삼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의 기준이 될 만한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성도의 행동기준이 바로 성령과 말씀이다. 한번은 사도 바울이 아시아 지역으로 선교를 떠나려고 했으나, 성령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셔서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했다(행16:6-10). 사도바울은 범사의 결정과 행동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순종하며 살았음을 볼 수 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실수도 없고 실패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 처사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16절)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4절)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래서 말씀과 성령으로 행동의 기준을 삼으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도 아니하게 되고 지혜로운 인생, 성공적인 인생, 복된 인생,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될 것이다.
3. 성령님으로 내 인생의 통치자로 삼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해석과 사탄의 해석이 정반대로 엇갈렸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것이고, 사탄의 유혹은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한 가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음성을 동시에 들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성도들은 날마다 그리고 순간순간마다 두 종류의 음성이 들려온다.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것은 생명의 음성, 신령한 음성, 거룩한 음성, 나를 살리는 음성이다. 또 하나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사탄 마귀의 음성으로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하는 음성, 유혹의 소리, 간교하고 달콤한 음성, 속이는 말, 가짜 행복을 꿈꾸게 하는 음성,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음성이다. 항상 이 두 가지 음성이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성령의 음성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이 바로 기록된 말씀이다. 성령님은 결단코 기록된 말씀과 위배되게 인도하지 않으신다. 만일 기록된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은 다 사탄 마귀의 음성이고, 생각이다. (고전4:6)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으로 하여금 나의 통치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님께서 나를 점유하시고 통치하시고 주관하시고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만일 내가 성령을 소유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성령님에게 내가 점유 당하여야 한다. 내가 성령을 조정하거나 부리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되고 위험하다. 성령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도록 해야 한다. 내가 성령을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시고 인도하시고 지배하시려는 내 인생의 주인(Lord)이요, 왕이요, 총사령관이 되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성령님께 대하여 불경을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자신들이 성령 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오만한 생각이고 방자한 행동이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내 인생을 지배자가 되시도록 해야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과 승리의 삶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결론: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엡5: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마가의 다락방의 무리들처럼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써야 한다(행1:14) 또한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 거역은 하나님 거역, 성령 거역이다. 성령강림주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은사도 받고 성령의 열매도 맺는 이런 은혜가 이 글을 보시는 모든 성도님들에 임하시기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