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상 목사 (뉴욕중앙산정현교회)
시편 42편을 보면 성도가 세상을 살 때 사람들이 성도들의 고통을 보면서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뇨 라고 비웃고 이때마다 성도들은 눈물을 주야로 음식을 삼았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살았으면 눈물을 가지고 주야로 음식을 삼았다고 고백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성도의 삶속에도 환난과 고통은 항상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찾아온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환난을 당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럴 때 어떤 대응을 하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대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적 대응이 있습니다. 마냥 한탄하고 원망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대응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왜’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과 고통 속에서 찾아오신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고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환난과 고통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가를 살펴서 우리의 대응으로 삼고자 합니다.
온 이스라엘을 피해서 이방 땅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는 갑니다. 그리고 저들이 먹고 죽을 한주먹의 밥을 먹고는 그 집안에 큰 축복이 내리게 됩니다. 비워지지 않는 떡반죽 그릇과 마르지 않는 기름병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근과 가뭄으로 온 땅이 굶어 죽을 때에 정말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받게 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행복에 겨워 하루하루를 환희 속에 보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을 때 아주 심각한 일이 발생합니다. 아들이 죽게 됩니다. 몇 살인지 무슨 병에 걸려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증하다가 숨이 끊어 졋다고 17절은 말씀합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생명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과부가 아니라고 해도 아들은 엄마에게 생명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과부는 당시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중근동지방에서 과부는 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당시의 여자들은 나이어려서는 아버지 손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지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손에 결정지어지고 나이 들어서는 아들의 손에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게는 문맥상 남편과 아버지는 없던 걸로 보여집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아들에게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 같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슬픔과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게 낫다고 통곡했을 것입니다. 이런 슬픔은 사르밧 과부를 큰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리고 시험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원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18절은 보면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습니까? 당신만 오지 않았다면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아주 매서운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회개하는 고백은 아닙니다. 내용은 모든 사람들이 어차피 죄인인데 다만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지 않고 살기에 저들이 지은 죄 값을 치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오는 바람에 하나님의 관심이 내게 쏠리게 되고 그리고 죄가 결국 드러나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아들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이고 신관이고 죄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엘리야도 시험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야 나름대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왜 하필 이집에 저를 오게 하시고 더욱이 지금까지 떡반죽 그릇과 기름병의 축복을 주셔서 정말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하시다가 하필이면 지금 과부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엘리야 선지자도 과부만큼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르밧 과부의 평범한 잘못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불평에만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축복에 대해서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난과 고통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르밧 과부는 아들과 함께 벌써 죽었을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곳에 오던 그날에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오늘까지 엘리야 선지자로 인해 먹고 마시고 축복을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받은 것은 별로 생각안합니다. 항상 잊어버린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에게는 이 사건이 단순하게 보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 먼 곳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제쳐 놓고 이 먼 이방 땅 두로와 시돈땅 사르밧에 보내시고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먹고 죽을 것도 없는 과부에게 보내주시고 지금까지 잘살게 하시다가 외아들을 죽게 하신 사실이 그냥 지나쳐 갈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해야 하고 이 기도를 통해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은 아이를 데려오라고 지시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기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지자일지라도 과거에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 생명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담대한 믿음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가능한 기도였습니다.
빈 골방에 들어가서 아이의 주검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립니다.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을 다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살아난 아이를 안고 다락방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 어머니에게 아들을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놀라우신 일을 사르밧 과부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외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줄 알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가 생명을 얻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내용도 매우 중요합니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다시 육체로 돌아오면 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단순히 육체와 영혼의 분리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에 잠자던 우리의 육체에 영혼을 다시 불러주셔서 모두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대 앞에 서서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믿는 자들은 영생의 심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너무나 귀한 것이고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역사를 중심으로 쓰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초청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개개인이 구원역사속의 주인공들입니다. 다 서로 다른 구원역사의 이야기 속에 주인공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어느덧 주인공은 사르밧 과부로 바꾸어졌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주인공이었지만 아들이 살아나고 과부의 신앙고백을 통해 주인공은 사르밧.과부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밝혀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교제를 하자고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교제의 방법이 고통스럽고 환난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찾아온 어려움과 고통들도 오히려 축복의 전주곡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시려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여지는 것만 가지고서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아무도 영생이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처한 형편에 대해 감사드리고 사순절기간동안 고난까지도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