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진 목사 (미주평안교회)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의 작품 중에 “노인과 바다”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멕시코 만류에서 고기잡이하는 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84일 동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85일 만에 5미터나 되는 고기를 3일간의 사투 끝에 잡게 됩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낚은 고기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를 만나 항구에 돌아왔을 때는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내용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허무함입니다. 헤밍웨이는 직접 전쟁에 참전해보았기에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권총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아버지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헤밍웨이는 삶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 일리 없습니다. 낚시나 여행을 많이 즐겼다고 하는 그도 결국 엽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한평생 질병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망하면서 슬퍼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복 있는 사람은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장수의 복,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아들 많은 복을 복이라고 합니다. 재물이 없었으면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재물이 있어서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건강도 잘 써야 복입니다. 참된 행복은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된 사람이 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부가 변화되어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참된 복은 세상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오는 깊은 만족감이 진정 행복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악을 따르지 않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사람이 악인의 꾀를 좇으면 죄인의 길에 섭니다. 죄인의 길에 서면 오만한 자리에 앉습니다. 죄는 나쁜 것 하나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씨앗은 금방 자라 다른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본래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롬6:20-21). 사망의 열매 밖에는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평생을 열심히 산다 해도 마지막은 죽음이며, 죽음이라는 열매 외에 삶의 궁극적 열매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떠났습니까? 고향, 부모, 형제, 자기 친구들을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말씀이기에 순종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순종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 숭배하는 지역이었고, 하나님 없는 삶이므로 과감히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아브라함처럼 죄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으로부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삶이 복있는 삶입니다. 말씀이 즐거운 자체가 복입니다. 말씀을 즐겨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 지키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복입니다. 다윗은 시51:10에 “하나님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십시오” 하는 회개의 시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범죄함의 원인이 다른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의 기준이 없었던 데에 있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 자신의 삶속에 있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구절에서 “오직”이라는 말에 더욱 주목해 봅시다. 복있는 사람은 말씀의 맛이 하도 달게 느껴져 밤낮으로 말씀을 음미합니다.
어떤 분은 말씀에서 “속박”을 느끼지만 어떤 분은 말씀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할 때 힘들지라도 나중에 보면 그것이 행복의 길임을 체험케 됩니다. 또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할 때 그것이 복된 것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면 그 말씀이 우리 영혼에 기쁘고 만족한 양식이 되게 합니다. 렘31:12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해진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다고 하였습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새김질”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복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선택받은 나무입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119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들을 수백절에 걸쳐 나열해놓았습니다. 첫째, 거룩함에 형통케 된다고 하십니다. 거룩함이란 악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시119:11에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셋째, 지혜를 얻는 형통입니다. 시119:97, 98에 “내가 주의 복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함으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세상을 살면서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지혜가 필요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잠3:18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잠24:3에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라고 말씀합니다. 돈으로 집안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집안을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그 만큼 지혜가 중요합니다. 지혜는 경험이나 세상의 모든 학문, 또는 우리가 존경하는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지혜, 보배로운 값진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복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야로 묵상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힘을 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골방에서 기도하시면서 말씀과 가까이 하십시오. 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순종하고 행하실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동행하며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아갈 때 복있는 자의 형통함을 모두 누리시게 되리가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