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덕근 목사 (은혜와평강교회 담임)
존중이란 그리스어로 ‘티메’라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는 ‘중요시 함’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티메’하면 ‘금처럼 귀중하고 중요한 것’을 떠올린다. 영어로는 honor로 번역된 이 말은 ‘진가를 인정함, 중시, 존경’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술로는 여호와를 존중(honor)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사 29:13). 오히려 세상 것을 좋아했고, 우상을 더 가까이 하였다. 존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고,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멸시하신다. 이것이 존중의 원리이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엘리 제사장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것이다. 이러한 일을 보고 들은 엘리 제사장 또한 그런 아들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엘리에게 ‘어찌하여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여기느냐’고 말씀하셨다. 엘리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겼다. 다시 말해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도 그를 멸시하셨다. 엘리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게 되었고, 그의 두 아들이 한 날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비보를 들은 엘리 역시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되었다. 엘리가 비록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비롯해 그 가정까지 멸시하신 것이다. 이것이 존중의 원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반면에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섬겼다. 그가 여호와를 존중하므로 하나님께서도 사무엘을 존중히 여기셨다. 사무엘은 자라면서부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 축복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지혜와 권능을 듣고 놀랐지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며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without honor)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could not do any miracles)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 6:4-5)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행하실 수 없으셨는가?’
그 핵심 이유는 존중치 못함에 있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존중하지 않았다. 주님을 귀하고 중한 분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저 가난한 목수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은혜로 와 닫지 않으니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 오직 능력은 예수님을 존중하여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순종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며, 자녀들을 귀하게 여겨 말씀으로 양육하라. 이것이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서로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부가 서로를 부를 때 대부분 ‘여보’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 뜻을 살펴보면 ‘여보’라는 말은 같을 ‘如’(여)자와 보배 ‘寶’(보)자를 써서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부가 서로에게 ‘여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내게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존중하며 살아갈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서로를 존중함이 있어야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외형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존중함이 없으므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성도들은 목사를 존중히 여기지 않고, 목사 역시 성도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며, 성도들끼리 또한 서로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불화하고 다툼을 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성도들이 서로 화목하는 것이 목회자를 존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존중히 여기셔서 복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존중하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셨다. 목회자를 존중함이 없는 교회에서는 말씀의 은혜도, 말씀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는 것도 존중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존중하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과 동일하다. “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honor, 존중)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3: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말3:16).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여기는 성도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과 형통함을 누리며 존귀한 자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다. 이와 같은 존중의 원리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이 형통케 되듯이, 존중하는 공동체 역시 형통케 된다. 가정이든, 교회든, 사업체든 그 곳이 어디가 되었든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그 공동체가 형통의 축복을 누리며 되는 것이다. 형통의 비밀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중요한 열쇠가 바로 존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