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 (수영로교회)
오늘 본문은 로마서 7장의 두 번째 부분으로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에 평안함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불편한 날을 만납니다. “내안에 내가 너무 많다”라는 노래가사처럼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어떤 때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허무한 것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 왜 이렇게 날마다 넘어지는가, 왜 자꾸 신앙이 위기를 맞을까?’라고 갈등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기 이전보다 훨씬 더 죄에 대해서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전에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지도 않고 죄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우리 안에는 내적인 갈등이 많이 일어납니다. 뭔가 모르는 불편함, 좌절감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나의 신앙의 삶과 현실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메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훈련도 받았고, 그 정도의 직분이라면 그에 마땅한 삶을 살아야하는데, 그 실력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할 때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은혜 안으로 들어온 이후에 죄는 훨씬 더 크게 부각됩니다. 예전 같으면 무시하고 살았을 것들이 이제는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나는 잘 해보겠다고 결심도 하고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패배의식과 탄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실패가 반복되면서 자기에 대한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내가 살고 싶은 삶과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격에서 오는 당혹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내 속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어떤 강력한 힘이 내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세력’, ‘죄의 능력’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자기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선한 것처럼 보이는데 들어가 보면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죄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자신은 잘 모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7:15). 내가 무엇을 행하는지조차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심각한 상태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할 때도 선함만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안에 불순함이 있고 악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춰보면 교묘하게 죄가 숨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완전하게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극복했다할지라도 또 다른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받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삼 년 동안이나 훈련시키며 다녔습니다. 스승 중의 스승 거인 중의 거인인 예수님과 합숙을 했고, 주옥같은 설교를 날마다 들었고, 눈앞에서 기적을 보았으며,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는데도 제자들은 그 모양입니다. 이 정도인데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얼마나 절망해보셨습니까? 우리는 자칫하면 가면을 쓰고 다양한 종교적인 의로 자기를 그럴듯하게 꾸미기가 쉽습니다. 베드로가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을 때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파산한 상태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라는 철저한 자기 부정, 자기에 대해 완전히 깨질수록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는 소망이 전혀 없고, 죽어 마땅합니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는 이 탄식은 변화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탄식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진 않지만, 승리를 암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바울은 24절까지는 완전히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침통한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점을 그리스도에게로 맞춥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내 노력으로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고 유혹을 하지만, 내 노력을 더한들 더 깊은 낭패와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관심과 초점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힘과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절감했을 것입니다. 죄를 짓지않으려고 노력할수록 죄에 더 빨려 들어갑니다.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은 노력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3의 힘이 개입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 부정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강도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의 문제로부터 승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결단코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죄의 파워가 강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파워는 훨씬 더 강합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죄의 능력을 이길 힘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죄와 싸우며 갈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라는 이 탄식은 일생 가운데 한번은 해야 합니다. 죄에 직면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실존의 밑바닥을 보면서 절대 절망의 자기부정을 한번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탄식과 절규를 일평생 계속하면 안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라는 바울의 말은 어쩌면 이미 소망의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면서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갑니다. 실패와 좌절, 후회와 낙심, 갈등을 반복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까지 이 죄의 문제와 싸울 것이지만, 이미 승리의 길은 열려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능히 싸워 이기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이제 낙심과 실의에 빠져 갈등하는 삶을 청산하고,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며 더 기대할만한 멋진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선포가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