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상 17장 8-16절)

정정식 목사 (하와이 한미장로교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난 뒤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을 외면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에서는 더 이상 은혜를 베푸시지 못하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예수님은 구약에 나오는 두 사람을 언급하며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은혜의 기회를 상실한 그들에게 은혜의 기회를 잘 살린 두 사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하나가 엘리야 시대에 시돈 땅 사르밧에 살았던 과부였습니다. 이 과부는 흉년으로 모든 먹을 양식이 떨어진 상황에서 계속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풍족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칭찬한 이 과부! 과연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그릿 시냇가에서 시돈의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할 것이 왜 굳이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를 그곳으로 보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굳이 그 과부에게로 보냈는가? 라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 선지자를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서는 보다 더 안전한 곳이나, 풍족함이 넘치는 가정으로 보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곧 이스라엘 남쪽에 위치한 나라든지, 물이 많은 곳과 곡식이 넉넉한 곳에 보내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오히려 가장 열악한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시돈은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비인 이세벨의 고향으로서 바알숭배가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도 마찬가지로 흉년으로 인해서 먹을 것이 다 말라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사르밧 과부도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약점이 많은 시돈의 사르밧의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볼 때 베드로전서 2:9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를 말해 줍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존귀한 존재로 만드신 목적은 한 가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런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증거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말씀에서 왜 엘리야가 시돈의 사르밧에 갔는지, 왜 그를 돌보는 사람이 과부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증명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시돈은 우상숭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여겨졌던 바알을 믿는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곳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면 결국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극심한 흉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알에 비해 하나님이 풍요를 보여주신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굳이 엘리야를 시돈에 보내신 것이고, 그곳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특히 우상숭배가 가득한 시돈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잘 믿고 있던 그 과부를 통하여 모든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받으시기 원하고, 그 일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돈처럼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심을 증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과부가 고백했던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모습이 아닌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사르밧까지는 그렇게 심각하게 떨어진 거리가 아닙니다. 약 100마일 정도의 거리입니다. 따라서 이 거리는 차로 2-3시간 거리 밖에 안 됩니다. 걸어서라면 넉넉하게 잡아 한 주가 채 안 걸릴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떡을 만들어 오라고 할 때 과부는 자식과 함께 한 번 정도 떡을 만들어 먹을 정도의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르밧을 향해 출발했을 때에도 이 과부는 그다지 많은 곡식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엘리야를 섬기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분명 남을 섬길만한 형편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겠다고 합니다. 왜 입니까?

또 엘리야가 와서 떡을 만들어 달라고 할 때 분명 이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난 뒤 자식과 함께 죽으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한테 이런 암담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비참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야는 떡을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만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과부는 그 순간 그대로 순종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상황이 되면 반발하거나 반항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 과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과부는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환경과 조건은 납득이 안 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이 결국 마르지 않는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칭찬까지 받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순간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납득할 수 없고, 때로는 앞이 꽉 막힌 것 같으며, 힘들고 어렵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하나님을 기뻐하셔서 이 사르밧 과부가 마르지 않는 축복을 누린 것처럼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누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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