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균 목사 (샬롯장로교회)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위치에 가끔 서 본다. 더구나 목회자라면 자주 그렇게 해야된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마쳐가는 중에도, 이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처치하고 가나안 직전 모압 평지에서 차세대에게 가나안을 들어가라 할 때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본문은 그들에게 그리고 모세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모세는 신명기 첫 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조상들에게 약속하셨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라! 그런데 가나안 입성을 앞에 놓고 너희 부모들처럼 절대로 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를 1장 시작하자마자 행정조직정비를 말하고 나서 즉시 언급하고 있다. 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다는 강한 교훈이다.
이것은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 후기시대에 들어선 우리가 다시 한 번 사느냐 죽느냐의 영적 대혈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둔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대부분 고생과 어려움 속에서, 아니 극한 가난 속에서 그리고 난리와 난리 속을 지나왔다. 그때는 그래도 삶은 어려워도 불타는 신앙이 있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신앙이 있었다. 하나님과 철저히 동행하며 모든 인생의 문제를 맡겼기에 오히려 두려워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생활수준은 좀 높아지고 문화수준은 세계를 달린다하여도, 느느니 경제와 질병 등 삶의 현장문제요, 들리느니 범죄와 자살과 폭력과 부정부패이다.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지고 참으로 앞 길이 안 보인다. 우리 세대의 신앙은 약해질대로 약해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반드시 망할 것 같은 위기의식이 있다. 그래서 모세를 다시 만나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 동역하였던 그, 모든 불신앙과 타락과 반역에서 끝까지 사명을 수행한 바로 그에게서 해법을 찾자! 우리는 이렇게도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며 멸망 길로 달려가는 세대에게 무슨 격려와 충고와 교훈을 줄 것인가?
1. 원망하지 않겠다(26-28절).
원망은 불신앙에서 나온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불행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한다면 반드시 환경으로 하나님 사랑을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경을 해석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버릴 환경이 결코 없는 것이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크고 높은 성들과 견고한 성벽, 그곳에 사는 네피림의 후손으로 알려진 아낙자손만 바라보고 있다. 지금 모세의 지도력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백성은 거의 언제나 원망을 일삼았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며 사랑하였기에 어떤 것도 두려워 할 게 없었고 그 어떤 것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지금 보이는 환경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체험하게 만들어줄 것뿐이다.
모세는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을 다 멸망시키신다고 하여도 변함없는 하나님 사랑에 간절히 간절히 의지하여 목숨 걸고 백성을 살려내는 복을 받았다. 우리도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어 인생을 이끌어나가고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약한 신자와 불신앙의 세대를 위하여 산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문제는 나에게 먼저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서서 내 신앙경험을 더욱 증대시켜 나가고 그 귀한 경험으로 내 주위를 올바로 인도하고 영향력을 끼쳐 선한 인도를 철저히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곧 희망이요, 이 시대의 문제해결이다.
모세는 끝까지 백성의 이 원망과 싸워야 했고 지금 우리도 바로 이 원망 곧 그 근거인 불신앙과 싸워야 한다. 아무리 세대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불신앙으로 떨어지고 하나님께 도전한다고 하여도 우리만이라도 제대로 서서 모세 같은 신앙만 가지고 전진한다면 문제가 무엇이겠는가? 능히 이 세대를 구할 수 있으리라! 신앙은 체험이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도, 우리가 먼저 더 많은 체험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대대적으로 보일 수만 있다면 희망은 있고 이 민족이 새로워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우리가 우선 교회에서 모두 같이 기도하던 제목들이 이루어질 때 얼마나 흥분되며 확신되며, 가슴 뛰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는가?
2.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말하겠다(29-33절).
아무리 주위에서 떠들고 원망하여도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랬기에 모세는 두려워 말라, 무서워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온 세상천지 아들 하나 믿고 기르고 살다가 그 아들이 죽었을 때에 모든 절망과 탄식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도 그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시던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왜 울지 말라고 하셨는가? 능히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실 수 있었기 때문 아닌가? 마찬가지로 모세는 이러한 확신과 체험으로 백성을 안심시키며 강하게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모세의 말대로 되었다. 아니 백성들의 말대로 되었다. 각자 고백한 대로 되고 말았다. 사람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말하며 행동하는 가가 아주 중요하다. 본문에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어렵고 절망스러운 때 모두 다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세 가지로 더욱 체험하여 보자!!
첫째, 능력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과거 역사하셨음을 잊지 말자. 늘 기억하고 묵상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충만하여 가나안 7족속 보다 몇 배나 더 강한 애굽을 과거 철저하게 물리치신 능력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다면 어려움이 와도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오히려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현재인 신앙이 내 것이 되도록 절대로 하나님의 권능의 사랑을 잊지 말자! 둘째, 아버지 같은 사랑을 잊지 말자. 아버지 같은 사랑은 무슨 사랑인가? 아직 어린 자식이 피곤하여 길을 걷기 어려울 때 안고 길을 가셨던 것 같은 사랑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사랑체험이다. 홍해 앞의 절망도 따뜻한 사랑의 배려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걷게 하셨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셨고, 목마를 때 물을 주셨고, 모든 필요의 하나님께서 아비가 자식의 모든 필요를 자세하고 따뜻하게 채워주시듯이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시 잊지 않는 기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권능의 사랑만 아니고 아비 같은 세밀한 사랑, 따뜻한 사랑.... 그것은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다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셋째, 인도의 사랑이다. 광야는 거칠고 척박하기 짝이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가 안전한지, 어디가. 물이 있고, 어디가 도둑이 없으며, 맹수가 출몰하지 않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광야 그곳을 완벽하게 아시고 가장 안전하고 쾌적한 곳을 찾아 사랑하는 백성이 진을 칠 수 있도록 앞서 가셔서 그곳에 구름 기둥이 머물게 하시며 혹은 불기둥을 머물게 하셔서 우리의 거칠고 예측불허의 위험한 생활의 상징인 광야생활을 완벽하게 이끄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 진지하게 돌이켜보자. 지난날은 어떠하였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전망할 수 있는가? 아무렴 광야생활의 이스라엘 같겠으며, 그들의 원망을 쉴 새 없이 들으며, 인도하였던 모세만큼 어렵기야 하겠는가마는 우리의 앞길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우리는 모세에게서 배우자! 확실하고 똑똑하게 배우도록 하자.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이나 문제를 보지 않고, 그리하여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세밀히 체험하고 잊지 않으므로 그분과 함께 불가능을 돌파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자. 모압 광야 그 많은 백성들 앞의 모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