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근 목사 (필라 몽고메리교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해주셨던 성령이 오시게 됩니다. 약속된 성령께서 오셨다는 외적인 현상으로 오늘 본문은 청각적인 면과 시각적인 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각적인 면으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v.2)로, 시각적인 면으로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v.3)으로 성령강림사건 현상들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은 ‘다른 방언’ 즉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 성령강림의 사건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같은 청각적 현상이지만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는 의성어에 불과할 뿐 사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언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청각적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령강림의 외적인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경우에 출19:18-19 시내산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그 때의 상황과 비교해 풀어가곤 합니다. 인간의 청각과 시각을 사용해 하나님의 현현(顯現)하심을 외적으로 표현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에는 특이한 현상이 보여지는데 그것은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우리가 일상생활 할 때 사용하는 보편적인 언어였습니다. 그것도 한 언어가 아니라 적어도 15개 이상의 각각 다른 언어가 성령강림의 사건에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성령강림사건이 있을 때 다른 나라의 방언(=언어)을 말하는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건강한 대답을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과 우리가 밟게 되는 선교의 현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성령님께서 이 땅에 와서 하시는 일이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 될 것(요15:26)이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셨을 때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redemptive history)를 완성시키시는 분으로, 그리고 그 구원을 우리로 하여금 세계만방에 증거하도록 만드시는 분으로(행1:8)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자마자 보편적인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점, 즉 방언을 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이 오시자마자 제자들로 하여금 15개 이상의 각각 다른 지역의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할 수 있도록 한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v.11). 오순절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긴박성입니다.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언어의 장벽입니다. 가난함이나 질병은 오히려 괜찮습니다. 더 큰 쓰라림은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있는 그들에게 소망과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죄, 의로움, 용서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단어를 사용해야할 때는 정말 힘이 듭니다. 주변에 통역을 해주실만한 분이 계시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선교지원주민과 단 둘이 있으면서 복음을 나누어야 할 때는 언어로 인해서 찾아오는 숱한 절망과 좌절을 가슴에 담곤 합니다. 그냥 상대의 손을 잡고 안타까운 마음과 사랑을 눈물로써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상대가 처한 상황이 긴급하면 할수록 전도자의 마음은 더 아프게 됩니다. 건강이나 전쟁 때문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선교지의 영혼에게 오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소개하지 못할 때, 그때 우리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며 장벽인지 뼈저리게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지의 언어를 배워 그 언어로 복음을 나눌 때까지 병들고 지친 선교지 영혼이 더 기다릴 수 없음을 알 바로 그때 오순절에 주어졌던 ‘방언’의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순절날 성령강림과 함께 방언의 은사가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는 일이 지체되어질 수 없는, 너무도 긴박하고 시급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패한 지도자와 백성들이 한 팀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생명의 구주가 되신다는 이 진리를 가장 빨리 증거하는 길이야말로 방언을 통해 직접 현장에서 바로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사건은 오늘 우리가 나누어야할 구원의 소식이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의 복음은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내용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통역을 사용해 복음을 나누는 것보다 가장 정확한 언어전달의 방식은 우리가 해당언어를 완전하게 습득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문화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압니다. 같은 단어라도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배경과 분위기에 따라서 대단히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외국인이 그런 모든 여건을 다 고려해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순절에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게 하심으로 복음의 내용이 변질되거나 오해됨이 없이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도록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복음은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증거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쏘아올린 우주선이 목표지점을 향해 날아갈 때 지극히 작은 각도 차이만 만들어져도 전혀 다른 목표지점에 도착하게 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을 향해 가는 길을 보여주는 생명의 복음은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선포되어야만 함을 방언의 사건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세 번째, 오순절 방언의 사건은 복음의 위대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사용하면서 말한 내용은 ‘하나님의 크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십자가 구원의 사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태어나고 처음 보는 현상이 오순절날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가 외쳐지고 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런 외적 현상에 놀라게 되고 흥미를 두었습니다(2:12).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외적현상보다 제자들의 입을 통해 외쳐지는 내용에 더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예수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운 적이라곤 한 번도 없는 다른 나라와 지역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이지만 그런 신비한 현상을 통해서 점점 집중을 받고있는 분은 다름이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예수를 통해서 구원이 주어졌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가장 위력적으로 방언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선포되었다는 점입니다. 오순절 방언의 사건은 십자가 복음의 위대함과 존귀함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 있었던 방언을 우리의 선교지와 전도지를 중심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소리로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그 음성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 인생의 구주가 되신다는 이 소식을 우리가 단 한 순간이라도 지체하지 않고 빨리 전해야만 한다는 긴박성을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식은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정확하게 전달돼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인류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비로소 삶의 방향과 의미 그리고 참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마음과 소원을 오순절 방언사건을 통해 찾아내어 우리의 오늘 현실에서 아름답게 이루어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